[살며 사랑하며] 서로에게 물든다는 것

2023. 9. 22.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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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한 시인에게 모임 제안을 받았다.

이름하여 '복숭아 먹고, 봉숭아 물들이기'.

말 그대로 복숭아도 먹고, 그가 요리한 음식도 즐기면서 봉숭아 물을 들이자는 취지였다.

그때는 물이 연하게 들면 김칫국물이 물든 것 같아서 촌스럽게 여겼는데, 지금은 인위적으로 선명한 색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빛이 도는 색이 곱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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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작년 여름 한 시인에게 모임 제안을 받았다. 이름하여 ‘복숭아 먹고, 봉숭아 물들이기’. 말 그대로 복숭아도 먹고, 그가 요리한 음식도 즐기면서 봉숭아 물을 들이자는 취지였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다가 문득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린다. 사람의 후각은 한 번 맡은 냄새를 평생 기억한다는 의미로 이를 프루스트 효과라 한다. 모임에 초대받은 날, 나도 프루스트 효과를 느꼈다. 그가 손톱 위에 봉숭아를 얹고 종이테이프로 감아 주는 순간 시큼하고도 짙은 풀 내를 맡자마자 옛 생각이 났다.

고향 집 장독대 옆에 봉선화가 여럿 피어 있었다. 언니는 꽃보다 잎사귀가 진하게 물든다고, 나더러 잎사귀를 더 따오라고 시켰다. 언니가 백반을 넣고 빻은 봉숭아를 동그랗게 뭉쳐 손톱 위에 올려주었다. 비닐로 감싼 손가락을 실로 묶을 때 오르내리던 언니의 숨소리. 그 조용한 시간의 흐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여름밤 언니들은 저마다 비닐로 손가락을 감싸고, 매듭이 쉽게 풀어지도록 실 리본을 묶었다. 손가락이 아플까 봐 헐렁하게 묶고 자는 바람에 아침이 되면 어느 결에 두세 개 빠져 있었다. 그때는 물이 연하게 들면 김칫국물이 물든 것 같아서 촌스럽게 여겼는데, 지금은 인위적으로 선명한 색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빛이 도는 색이 곱게 보인다.

봉숭아 물이 초승달처럼 남았을 때 자르기 아까워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 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말 때문이다. 누군가는 오글거린다며 핀잔줄지 몰라도 호기심 많던 시절, 순수한 이야기 하나쯤 믿어도 좋으리라.

모임을 제안한 시인의 다정함을 떠올린다. 그로 인해 추억을 소환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나를 떠올릴 때도 정다운 이야기 하나쯤 불러일으킨다면 좋겠다. 더 늦기 전에 그에게 연락해야겠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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