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시시때때로 무지막지한 ‘헐크’가 되고 싶다

입력 2023. 9. 22.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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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체력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힘이 약한 여성 상대 범죄에 분노 치솟아…
초록 괴물로 변신해 악당 무찌르고 싶어

어린 시절에는 약하고 평범한 인간이 강한 초능력자로 변신하는 TV 드라마가 유독 많았다. ‘6백만 불의 사나이’나 ‘소머즈’는 심한 상해를 입고 죽어가는 요원에게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돈을 써서 육체를 강하게 되살려낸 경우다. 평소엔 얌전한 직장인이지만 위급한 순간이면 폼 나는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며 슈퍼히어로가 되는 ‘슈퍼맨’과 ‘원더우먼’도 짜릿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영감을 얻은 듯 분노가 치솟으면 자기도 모르게 ‘초록 괴물’이 되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특히 인기몰이를 했다. 옷이 갈가리 찢어지면서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얼굴 생김새마저 흉악하게 변했다. 나쁜 악당들을 이리저리 내동댕이치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평범한 박사가 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 왠지 통쾌했다. 계속 이어진 속편과 영화까지 만들어지면서 유독 인기를 끈 이유가 뭘까. 다른 영웅들에겐 이성이 존재했지만 초록 괴물 ‘헐크’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초기 원시인을 닮은 모습 그대로 동물 같은 본능에 충실하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악당을 무찔렀다. 만화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해서 만든 드라마답게 무력한 어린아이들이 대리만족을 하기에 딱 좋다고 할까.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니고 누구보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그런데도 가끔은, 아니 종종 무지막지한 초록 괴물로 변신하고 싶다. 힘이 약한 아동, 여성, 노인들을 골라 계획적인 폭력과 성범죄를 저지른 뉴스가 들려올 때마다 분노가 치솟는다. 법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가소로운 힘자랑을 한 범인을 찾아가 얼굴이 죽사발이 되도록 두들겨 패면 좋겠다.

얼마 전 후배 여성 편집자 몇 명을 만났다. 대화를 나누다 ‘당연히’ 신림동 살인 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쳤다. 신기하게도 아니, 전혀 신기하지 않게도, 그 자리에 있던 다섯 명이 공통된 경험을 꺼내 놨다. 하나같이 출근길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단다.

사방으로 촘촘히 들어차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 숨도 쉬기 어려운 그 와중에 내 몸을 더듬는 불쾌한 느낌. 나 역시 젊은 시절 비슷한 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소름이 끼쳤는데도 무서워서 끽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더러운 모멸감은 몇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길을 가다가 그야말로 봉변을 당했다. 따릉이를 타고 천천히 가는데 앞쪽에서 다가오는 남성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일부러 멀찍이 피해 가는 나를 향해, 아니나 다를까 눈을 희번덕거리며 쌍욕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백주대낮에 지나가는 모르는 여성을 향해 욕을 하는 생물체의 정신 상태는 뻔하다.

“야! 이 미친놈아,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너도 당해 봐라, 똑같이 욕을 해줬다. 마침 자전거를 타고 있기에 냅다 페달을 밟았다. 힘없는 중년 여성이 할 수 있는 그나마 최대한의 복수였다. 그랬지만 통쾌하기는커녕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았다. 더러운 개똥을 밟은 것 같았다.

공원 둘레길을 걷던 여성을 무자비하게 강간 살인한 이번 신림동 사건은 더욱 끔찍하게 다가온다. 특별히 외지거나 인적 드문 곳이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이 매일 이어지는 곳에서 발생했기에 충격이 가시질 않는다. 운동 삼아 자주 오르던 동네 앞산에 가기도 무서워졌다. 어쩌다 한적한 곳을 걷다가 남자 사람을 마주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마음 같아선 당장 무지막지한 헐크가 돼 여성 피해자가 당한 고통을 범인에게 고대로 되돌려주고 싶다. 오죽 현실이 답답하면 만화적 상상력에라도 의지해 직접 처단하고 싶다는 생각을 다 할까. 여성 모두가 공포와 분노로 가득한 초록 괴물로 변신하지 않도록 해 달라. 그나마 생긴 ‘여성안전귀갓길’ 시스템을 더 철저히 강화해 달라. 강력한 법의 힘으로 비슷한 범죄가 재발하지 않게 지옥 같은 처벌이 내려지길 바란다.

마녀체력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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