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세요, 둘러대세요’… 고객 갑질 보다 더 나쁜 사업장 [이슈&탐사]
감정노동을 유발하는 계기는 일터 밖 소비자의 갑질이지만, 감정노동을 완성시키는 것은 사업장의 방관과 동참이다. 많은 감정노동자는 “고객은 차라리 견디겠다. 사업장이 더 나쁘다”고 말한다. 관리자들은 맨 앞에서 외부의 불만을 감당하는 콜센터 상담사, 경비노동자, 백화점 판매직들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재량권 대신 “고객 불만 평가를 실적에 반영한다”는 지침을 줬다.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한 여성은 “눈앞에는 갑질, 등 뒤에는 생계 위협이 있다”고 말했다.
“보상요구 다분… 장애지만, 장애 언급 말라”
이익만을 최우선 고려하는 사업장은 때론 고객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과를, 때론 사실과 동떨어진 대응을 주문하는 식으로 노동자를 벼랑끝에 내몬다. 한 대형은행 콜센터 상담사들은 2019년 인터넷뱅킹 로그인 장애 사태 당시 사측으로부터 ‘당행 시스템 장애 언급 금지’ 공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시스템 장애를 빌미로 보상 요구가 다분해 시스템 장애 언급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콜센터 상담사들에게 전파된 응대방안은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고 양해 말씀 드린 후 보상 요구하시는 고객께는 ‘익일 소비자보호부 접수 안내 부탁드립니다’”였다.
이는 명백한 문제 상황에서 금전적 손해를 염두에 둔 사업장이 고객의 항의와 분노를 말단 노동자에게 몰아버린 사례다. 감정노동자들은 이 과정에서 문제를 빙빙 돌려 말하거나, 심지어는 사실과 다른 응대를 해야 한다. 이런 사측의 대처는 콜센터 상담사와 민원 응대 공무원 등 최전선에 선 이들이 “앵무새냐” “인공지능(AI)을 틀어놓은 거냐”는 폭언을 듣는 원인이 된다. 2018년부터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의 시행으로 사업주가 고객의 감정노동자 폭언을 막는 문구를 게시‧안내하고 있지만 이는 근본 대책이 못된다. 정작 사업주가 스스로의 책임을 덜려 고객의 갑질과 말단 직원의 감정노동을 부추기는 경우는 직역을 가리지 않고 국민일보에 증언됐다.
관리자는 노동자가 고객에게 얼마나 고개를 숙이는지를 평가하고, 고객은 이 생리를 약점으로 잡는다. 경기 지역 한 아파트의 경비노동자가 국민일보에 보내온 근무 평가표에는 관리자가 감정노동을 부추기는 구조가 드러나 있었다. 복무규정과 근무실태 등 6개의 항목 총점 100점을 평가하고, 총점 70% 미만인 자를 업무 부적격자로 판정한다는 근무 평가표였다. 세부 평가내용에 따라 최소 3점부터 최대 20점(징계 의뢰)까지 감점할 수 있었다.
눈에 띄는 대목은 감점의 사유였다. 관리자는 경비노동자와 주민 사이 언쟁이 있기만 해도 5점을 감점했고, 태도 불량·불평불만·서비스 정신 부족을 평가한다고 밝히고 있었다. ‘친절’ ‘인사 잘하기’ 따위의 계량화하기 힘든 항목도 감점요소로 적용되고 있는데, 쉽게 말해 주민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점을 받을 수 있는 형태였다. 여전히 많은 아파트 경비노동자가 입주민 차량에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업무도 아닌 분리배출 일을 거드는 풍경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고객 별점이 무서운 이유
갑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일부 관리자가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사라지진 않았다. 수도권 한 행정복지센터에서 일하는 8급 공무원 A씨는 지난겨울 7급인 상사로부터 “일도 똑바로 못하는 너 같은 XX는 민원 보면 안 된다”는 폭언을 들었다. 마스크 없이 센터에 들어온 민원인에게 “마스크를 써 달라”고 요청했다가 언쟁을 벌인 뒤 들은 말이었다. 방역 정책에 따른 정당한 요구였지만 상급자의 폭언, 동료들의 박한 역량 평가가 이어졌다. A씨는 “감정노동자로서 보호받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다 보면 인사평가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불합리한 일들은 생계를 볼모로 잡아 계속된다. 사업장의 ‘을’들끼리 또다시 갑을을 나눠 감정노동을 전가하고, 사실상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서로 분노하는 일도 발생한다. 한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는 B씨는 “입주민들이 공동주택관리법에 어긋나는 요구를 할 때가 많지만, 이를 거부하면 관리업체에 ‘소장을 교체하라’는 압력이 들어온다”고 했다. B씨는 “업체에서는 재계약을 따내기 위해 입주민의 부당한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하는데,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은 관리소장이 진다”고 말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 신분으로 분류된 플랫폼 노동자들은 사측이 고객의 ‘별점’을 악용한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일부 배달 플랫폼에서 고객의 항의를 받은 배달 노동자에게 ‘똥콜(드나들기 어려운 지역의 배달)’을 몰아주거나, 콜 자체를 줄이는 방식으로 불이익을 주고 있다는 의심이다. 사측은 영업 비밀임을 이유로 콜 배정 알고리즘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이는 노동자가 무조건적으로 고객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로 결정된다. 선동영 한국노총전국연대노조 플랫폼배달지부 지부장은 “사측에선 고객과의 마찰이 불이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플랫폼 노동자들은 불이익을 체감한다”고 했다.
올해 입주가 이뤄진 서울 강남구의 한 신축 아파트에서는 경비노동자가 배달업체 직원을 막아서고, 배달업체 직원은 오토바이를 세운 후 불만을 표하며 물품을 들고 걸어가는 장면이 포착된다. 이 아파트의 지하주차장 입구는 단지 바깥에 있고, 입주자대표회의는 배달하는 이들을 주차장에 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누군가의 결정 맨 아래에서, 이 사회의 감정노동자들끼리만 얼굴을 붉히고 있다. 이 아파트에 배달을 해본 일이 있다는 C씨는 “비 오는 날이면 배달 음식이 비에 다 젖는다. 입주민의 결정이라는 건 알지만 예외 없이 막는 경비원도 야속하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이택현 김지훈 정진영 이경원 기자 alley@kmib.co.kr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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