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타인에 제공할 의도 숨기고 계좌 개설… 업무방해 아냐"
보이스피싱 범죄에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타인에게 양도할 목적으로 은행 계좌를 개설했더라도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은행 직원의 요청을 받고 위조한 서류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기망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용 목적을 감추고 심사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했을 뿐이라면 위계로 업무가 방해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대법원은 상대방의 신청을 받아 자격요건을 심사하는 업무의 경우 신청인이 제출한 허위 신청사유나 소명자료를 업무담당자가 그대로 믿고 수용했다면 신청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업무방해죄 성립을 부정해왔는데, 이 같은 법리를 은행 계좌 개설 사안에 적용한 첫 판결이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업무방해 및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2심 재판부가 A씨의 업무방해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봤다. 다만 재판부는 A씨가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현금카드나 OTP기기 등 접근매체를 대여 또는 보관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본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원심의 이유 설시에 일부 부적절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피고인의 행위가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본 결론은 정당하고, 원심의 이 부분 판단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채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반면 A씨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 중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현금카드나 OTP기기 등 접근매체를 대여 또는 보관한 행위를 무죄로 판단한 것에 대해 "이 부분 원심 판단에는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3항 3호가 정한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에서 말하는 '범죄'의 의미와 위 조항 위반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라며 "이를 지적하는 상고이유는 정당하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A씨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B씨의 부탁을 받고 2020년 8월 유령회사를 설립한 뒤 법인 명의 계좌를 허위로 개설해 금융기관 담당 직원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또 보이스피싱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도 계좌에 연결된 현금카드, OTP기기 등을 대여하거나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카드를 보관해 전자금융거래법을 위반한 혐의도 받았다.
1심은 A씨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2개월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업무방해 등 일부 혐의를 무죄로 뒤집고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업무방해를 무죄로 본 항소심 판단은 타당하다고 봤다. 범죄 이용 목적의 계좌가 개설된 것은 신청인의 허위 답변을 철저히 검증하지 않은 은행 직원 등 금융기관 측 잘못이라는 이유에서다.
앞서 대법원은 유사한 사례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신청을 받아 일정한 자격요건 등을 갖춘 경우에 한해 그에 대한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업무에 관해서는 신청서에 기재된 사유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해서 자격요건 등을 심사·판단하는 것이므로, 업무담당자가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지 아니한 채 신청인이 제출한 허위 신청사유나 허위 소명자료를 가볍게 믿고 수용했다면 이는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으로서 신청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사안에서도 재판부는 같은 법리를 적용했다.
먼저 재판부는 "피고인은 법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이 미리 마련한 양식인 예금거래신청서나 금융거래목적 확인서에 금융거래목적을 '사업거래중' 또는 '법인통장개설'이라고 기재하고, 접근매체 양도의사 유무에 관한 질문사항에는 '아니오'로 답변하는 등 소극적인 행위만 했다"고 전제했다.
이어 "피고인이 위와 같이 법인 명의의 계좌개설을 신청하면서 제출한 관련 서류들은, 계좌 명의자인 회사의 사업사실 등록을 증명하거나 회사가 상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성립돼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한 사업자등록증, 법인등기사항증명서, 법인인감증명서, 정관뿐이었다"라며 "이들 서류 외에 피해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피고인에게 금융거래 목적 등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추가적인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거나 이를 확인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법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하면서 작성한 예금거래신청서나 금융거래목적 확인서는 내용의 진실성이 담보되는 서류라고 볼 수 없고, 제출된 관련 서류들도 법인 명의 계좌개설시 기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서류들로 보일 뿐, 계좌 명의자인 각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거나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등의 진실한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계좌개설 심사업무를 담당하는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기재된 금융거래 목적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추가로 그에 관한 객관적 자료의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적절한 심사절차를 진행했음에도 피고인이 그에 관해 허위 서류를 작성하거나 문서를 위조해 제출함으로써 업무담당자가 허위임을 발견하지 못해 계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은 찾아보기 어렵다"라며 "결국 이 사건 각 법인 명의 계좌가 개설된 것은 피해 금융기관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으로 볼 여지가 많아 계좌개설 신청인인 피고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으므로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반면 재판부는 항소심 판결 중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죄를 무죄로 본 부분은 잘못됐다며 판결을 파기했다.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3항은 접근매체를 사용 및 관리함에 있어 금지되는 행위를 열거하고 있는데, 3호에 '범죄에 이용할 목적으로 또는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접근매체를 대여받거나 대여하는 행위 또는 보관·전달·유통하는 행위'를 금지행위로 들고 있다.
항소심은 A씨가 대여한 접근매체가 어떤 범죄에 이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검사가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못했고, A씨가 보관한 카드는 경찰의 수사협조자가 검거 목적으로 준비한 것이어서 범행에 쓰일 가능성도 없었다며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전자금융거래법의 입법 목적과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3항 3호의 신설 취지 등을 종합해 보면, 위 조항이 규정하는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에서 말하는 '범죄'는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행위로서 형법 등 형벌법규에 규정된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라며 "따라서 접근매체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행위에 이용될 것을 인식했다면 위 조항의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았다'고 볼 수 있고, 접근매체를 이용해 저질러지는 범죄의 내용이나 저촉되는 형벌법규, 죄명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인식은 미필적 인식으로 충분하다"며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았는지는 접근매체를 대여하는 등의 행위를 할 당시 피고인이 가지고 있던 주관적 인식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되고, 거래 상대방이 접근매체를 범죄에 이용할 의사가 있었는지 또는 피고인이 인식한 것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또 재판부는 "전자금융거래법 제6조 3항 3호에서 정한 '범죄'는 피고인이 목적으로 하거나 인식한 내용에 해당하므로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등을 위해 공소사실에 특정될 필요가 있다"라면서도 "위 조항의 신설 취지 등에 비춰 공소사실에 '범죄'에 관해 범죄 유형이나 종류가 개괄적으로라도 특정돼야 하지만, 실행하려는 범죄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고 볼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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