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보좌관, 강사... 세상을 바꾸는 데 정년은 없어요"

문세경 2023. 9. 2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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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자노조 이음나눔유니온 인터뷰] 신언직 전태일재단 노동인권 강사

[문세경 기자]

 중구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신언직
ⓒ 문세경
 
"올해 환갑이 되었지만 저는 현재 직업이 있어요. 특성화고에서 노동인권 강의를 하고 전태일 기념관에서 시민들과 노동조합을 대상으로 노동인권 교육을 하고있어요."

지난 9월 5일, 중구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신언직(60, 전태일재단 노동인권 강사)을 만났다. 신언직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인사한다. 그와 만나기 며칠 전, 그동안의 활동을 요약해서 적어 달라고 했다. 메시지 창에 빽빽히 적힌 활동내용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떤 질문을 해야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설계한 인생 2막은 예상대로 펼쳐지고 있을까, 말 못할 사연을 들추지는 않을까, 하면서 며칠 동안 고민에 빠졌다. 

신언직은 내 속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직업을 말하고 말문을 텄다. 질문을 마음껏 해도 될 것 같은 신호로 들렸다. 내가 "사생활 터는 데 전문"이라고 장난스레 말했더니 "얼마든지 털어가라"며 해맑은 얼굴로 답했다. 

세 번의 감옥생활, 그를 버티게 한 힘 

메시지창에 빽빽하게 적힌 활동에는 '감옥생활'이 무려 세 번이나 쓰여 있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빡세게 살았다는 걸 알고 놀랐다. 그는 세 번의 감옥생활을 어떻게 견뎠을까. 

"세 번 모두 독방에 있었어요. 시간이 안 가는 게 제일 힘들었죠. 맨날 수배당하고 도망 다니느라 밥을 잘 못 먹었어요. 그래서인지 감옥에서 먹는 밥은 맛있었어요(웃음). 두 번째 감옥에 갔을 때는 동구사회주의가 무너졌을 때에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감옥생활이 힘든 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못 찾아서였어요. 노동조합 위원장도 아니고, 뛰어난 이론가도 아니고, 의욕만 넘쳤던 활동가여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세 번째 감옥에 간 것은 2000년에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투쟁을 하다가 구속됐어요."

신언직은 세 번의 감옥생활에서만큼 진지하고 치열하게 삶을 고민한 적이 없었다. 고통을 겪은 인간은 단단해진다고 했던가. 몇 개월에 걸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면서 다짐했다.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치열함과 진지함이 있다면 못 할 것이 무엇이냐. 뛰어난 이론가가 아니면 어떻고, 배고픈 노동자가 아니면 어떻고, 유명한 대중 지도자가 아니면 어떤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뚜렷한 소명이 있으면 그 길을 가면 된다'고. 

1992년, 두 번째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신언직은 곧바로 제13대 대통령 선거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운동본부에서 활동한다. 2000년, 세 번째로 구속되었을 때는 결혼 후였다. 사회에 발 딛자마자 활동을 시작했고 그 후로도 줄곧 제대로 된 밥벌이를 못 했을텐데 가족의 생계를 어떻게 꾸렸을지 궁금했다. 

"처음 사회 활동을 한 곳은 1992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였어요. 그때는 월급이 없었어요. 활동비로 5만 원 받았어요. 1995년에는 민주노총에서 일했는데 월급제를 도입해서 첫 월급으로 75만 원을 받았어요. 그 이후에는 전 민주노동당 의원이었던 단병호 위원장님의 보좌관 활동을 해서 수입이 있었어요. 하지만 당시 노동자의 평균임금인 180만 원만 받고 나머지는 특별당비로 냈어요. 180만 원으로 두 아이와 아내를 책임지기에는 부족했어요. 아내는 전공이 미술이었는데 원하는 그림을 못 그리고 돈을 벌 수밖에 없었어요."

신언직은 자신이 일관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분이라고 했다. 1992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두 번째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오면서 결심한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노동운동을 하고, 40대에는 진보정당을 만드는 일을 해 보겠다고. 그가 결심한대로 40대 초반까지는 전노협과 민주노총에서 활동했고, 40대에는 민주노동당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50대에는 생각지도 않게 심상정 의원 보좌관을 두 번(8년)이나 했다. 신언직은 두 번의 보좌관 생활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 플랜에 없던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기회를 얻었어요. 밤, 낮이 따로 없는 바쁜 생활이었지만 무척 보람있는 일이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삼성 무노조전략문건을 입수해서 공개한 거예요."
 
 2020년 심상정 의원실에서
ⓒ 신언직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 현실 정치를 알았고,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자 아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가정 경제의 책임을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아내의 뒷바라지로 활동하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뻔했는데 말이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주역들이 이렇게... 불행한 일"

생각지도 않았던 두 번의 보좌관 생활을 마치고 올해 환갑을 맞은 신언직. 그의 인생 2막은 어떻게 펼쳐지고 있을까. 

"제 인생의 첫 번째 변화는 83년도에 전태일을 만난 거예요. 두 번째 전환점은 노회찬을 만난 거예요. 단병호, 노회찬, 심상정과 함께 진보정치를 했고, 다시 전태일로  돌아왔어요. 60세가 넘으면 전태일과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태일재단에서 노동인권강사로 활동하고 있고요. 이음나눔유니온 활동은 그 연장선이죠. 

고령화 문제와 저출산 문제는 거의 맞물려 있어요. 노동빈곤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요. 60년대생 860만 명이 퇴직을 해서 거리로 나오고 있어요. 이들에겐 퇴직 이후의 삶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요. 재취업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폐지 주워서 생활하는 사람도 많죠. 국민연금이나 복지정책이 제대로 안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민주화와 산업화의 주역들이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죠. 그래서 당사자들이 나서서 운동을 해야 해요. 유럽이나 미국처럼 은퇴자 노조를 만들어서 활동해야 해요.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이끌어내야 해요. 이런 맥락에서 이음나눔유니온 같은 조직이 필요한 거고요."

신언직은 퇴직하고 쏟아져 나온 민주화와 산업화의 주역들이 행복한 인생 2막을 살기를 바란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하고 싶은 취미 활동을 하고,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여유 있는 은퇴 후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빛나게(폼나게)는 아니어도 잘 살자'는 게 저의 인생 2막 목표예요. 되돌아 보니까 저는 굉장히 부자더라고요. 경제적으로 부자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함께해 온 사람들이 제 옆에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의 재산이에요. 만약에 돈을 벌기 위해서 살았거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살았다면 제 옆에 사람들이 없을 수도 있죠. 60세 이후에도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과 관계가 지속되고 돈독해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부자예요(웃음)." 

물질적인 부를 이룬 것보다 자신 옆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에 흐뭇해하는 신언직. 그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아름답다. 
 
 2023년, 특성화고에서 노동인권 강의 하고 있는 신언직
ⓒ 신언직
 
 2023년, 중구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퇴직자 교육을 하고 있는 신언직.
ⓒ 신언직
 
신언직은 노동인권강사로 일할 뿐만 아니라, 이음나눔유니온의 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퇴직자들이 각자도생하지 않도록 이음나눔유니온이 어떻게 손을 잡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퇴직후에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고민 해소의 일환으로 퇴직자 교육을 하고 있다. 퇴직교육은 법률에도 명시된 의무교육이다. 

"8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매주 수요일에 중구노동자종합지원센터와 이음나눔유니온이 주최한 '퇴직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워크숍이 있었어요. 퇴직자가 직면한 현실을 살펴보고 어떻게 퇴직 준비를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의 발제를 제가 했어요. 발제를 준비하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60년대생 860만 명이 쏟아져 나오는데 사회복지가 제대로 안 되어 있으니 다들 불안해한다는 점이에요. 산업화와 민주화의 주역인데 왜 인생 2막이 축복이 아니라 불행일까요. 퇴직 이후에 빈곤하고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나라.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년이 되었어도 쉬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신언직, 세상과의 비타협은 그의 숙명인가보다. 정년 없이 싸우려면 몸과 마음의 건강도 돌봐야 한다. 신언직은 그 일을 게을리 않지 않는다.  

"전태일 기념관에서 노동인권 강사를 일주일에 한 번 하고, 이음나눔유니온 조직위원회 일과 이음나눔유니온 기획위원회 일을 하느라 주중에는 정신이 없어요. 평일에 틈틈이 걷기 운동을 해요. 주말에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아내도 저도 미술관에 가서 그림 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올해는 결혼 30주년이고, 제가 환갑을 맞은 해에요. 지난 봄에 아내와 함께 뉴욕에 다녀왔어요. 그곳에서 딸이 일하고 있거든요."
 
 2023, 8월. 퇴직자를 위한 강사양성교육을 하고 있는 신언직
ⓒ 신언직
 
온갖 수난을 겪으며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청춘은 이제 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 말미에 그가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데는 정년이 없어요. 올해 말까지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 300명 만드는 게 목표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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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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