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노예, 내가 돈 주니까 시키는 대로…” 출근 차량에도 고개숙인 경비노동자 [이슈&탐사]
많은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쉬는 아파트에서, 또 다른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이 시작된다. 국민일보는 경비노동자 129명으로부터 이들이 입주민에게서 들은 무자비한 갑질의 말들을 자필 기록으로 얻었다. 물론 경비노동자가 처한 현실에 공감하고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는 아파트 입주민도 생겨났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노동자를 죽음에 이르게도 하는 극소수의 송곳 같은 갑질도 계속된다”는 증언이 나왔다. 경비노동자들 역시 “왜 바뀌지 않느냐”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들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새겨 국민일보에 제공한 자필 기록에는 갑질이 끊이지 않는 원인을 엿볼 실마리가 담겨 있다. 입주민들은 “너는 노예” “재계약 때 두고 보자”고 말하곤 했는데, 경비노동자의 3개월 초단기 계약 굴레를 볼모로 잡은 말들이었다. 애초 기울어진 관계 속에서 경비노동자는 “부당한 지시지만, 얼굴 붉히지 말자”며 스스로 참을 때가 많았다. 이들은 다른 노동자가 일터로 향하는 출근 차량 앞에 고개를 숙였다.
국민일보는 지난달 경기 안양시에서 열린 ‘전국 경비노동자 한마당 행사’ 참석자 129명을 대상으로 갑질-감정노동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을 보면 경비노동자가 겪는 감정노동의 양태 중에는 ‘불합리·불공정한 요구’가 75명(58.13%)으로 가장 많았다. 불공정한 요구를 거부하는 경비노동자들을 향해선 폭언과 욕설이 뒤따랐다. 많은 입주민은 “내 돈 받고 이런 것도 못 해주냐”고 말하고 있다. 입주자대표회의(입대의)가 비용을 부담했으니 웬만한 잡일은 주문할 수 있다는 태도다.
경비노동자가 가구마다 고지서를 나눠주거나 장비를 들고 도색할 때도 있지만, 이는 엄연히 공동주택관리법이 정한 경비노동자의 업무 이외의 일이다. 누구도 규범을 떠올리지 않은 상황에서 경비노동자들이 경비 이외의 일을 하는 이유 가운데에는 ‘누구의 지시인지 정확히 몰라서’도 있다. 때론 입주민이, 때론 과잉 충성한 관리소장이나 경비반장이, 때론 눈치를 보는 용역업체가 경비노동자에게 업무 이외의 일을 주문하는 갑질을 한다.
복잡하게 존재하는 아파트의 계층 속에서 경비노동자들은 가욋일에 내몰리고, 입대의는 불합리한 요구를 관철하곤 한다. 일례로 서울 강남구의 구축 대단지 아파트 관리소장 A씨는 최근 입대의로부터 “경비원들에게 풀을 뜯으라고 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기계를 들고 아파트 단지 전반을 제초할 때에는 외부업체와 계약을 해야 하는데도 무리한 주문이 이뤄졌던 것이다. A씨는 경비노동자들에게 제초를 지시할 수 없다고 설명했으나 주민 비난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A씨는 경비원을 고용한 용역업체 대표에게 입대의의 뜻을 전할 수밖에 없었고, 경비노동자들은 누가 시킨 일인지 알지 못한 채 제초기를 등에 짊어졌다. 경비노동자는 자신이 하는 업무 이외의 일이 관리사무소의 지시인지 용역업체의 지시인지 아니면 경비반장의 과잉 충성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A씨는 “관리소장들이 경비노동자보다 더 ‘파리 목숨’”이라고 했다.
관리소장이 직접 경비반장을 압박할 때도 있다. 경기 용인시의 한 공동주택에서 근무하는 경비노동자 B씨는 “기계를 메고 하는 제초 작업이나 전지작업(가지치기)을 지시하면 일단 거부한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소장이 경비반장을 업무 회의에 불러 간접적으로 압박하면 ‘입주민과 얼굴 붉히는 상황 만들지 말자’라면서 결국 업무를 떠맡게 된다”고 말했다. 경비노동자들은 관리소장 지시를 거부하면 입주민 마찰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감정을 숨긴다.
입주민으로부터 ‘인격적 모독과 폭언, 욕설’ 등을 겪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44.18%(57명)에 이르렀다. 직접적인 욕설 말고도, 경비노동자를 낮잡고 멸시하는 말이 많았다. 돈을 지불했으니 당당히 하대한다는 태도가 엿보이는 말들이었다. “평생 경비하다 죽어라” “그러니 경비나 하지” “나중에 저 아저씨처럼 되지 마” “나이 먹고 이런 일이라도 하는 게 어디냐. 참아라” 따위의 말도 있었다. “잘라 버릴까? 한 방에 보낸다”고 협박하는 말을 들었다고 적은 경비노동자도 있다.
노골적 욕설은 과거보다 줄었다지만, 경비노동자가 입주자와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받진 못하는 풍경이 여전하다. 서울 용산구 한 신축 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은 지난 7월 한동안 지하주차장 출입구에서 일과를 시작했다. 오전 8시부터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주민들의 차량에 일일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라는 아파트 관리소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이 행위를 지시한 건 아파트 관리소장이었고, 동대표가 만류해 지금은 하지 않는다. 경비노동자들이 “의전 행위는 업무에 없다”고 반발해도 한동안 강행됐다.
입주민들의 모독적 언사는 저임금으로 내몰리는 고령 노동시장의 구조와 초단기 계약 형태 등 노동자의 약점을 정확히 겨냥한다. 이남신 서울노동권익센터 소장은 “감정노동의 문제점이 지속되는 건 전반적으로 감정을 유발하는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기본적인 예우가 없는 게 큰 문제인데, 이런 것들은 대부분은 근로 조건과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휴게공간 부족과 초단기 계약, 부당한 업무지시 등의 문제는 시간이 흘러도 근절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업무구조의 부당함을 이해하지 못한 입주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큰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위정량 강동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은 “휴게실이 없어서 휴식 시간에 초소에서 쉬는 경비노동자까지 관리사무소에 신고하는 입주민이 있다”며 “그게 다 노동자 핍박인 셈이지만 주민들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서울 강남구 S아파트의 한 경비원이 관리소장의 갑질을 주장하는 유서를 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는 경비원법 등 근본적 제도 정비 없이는 문제가 계속될 것이라 예견했다. 수년 전 무자비한 해고 통보를 받고도 입주민들의 지지 속에 복직 투쟁에서 잠시 승리를 맛봤던 한 경비노동자는 국민일보에 “언론에 보도돼도 바뀌는 게 없더라”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이택현 정진영 김지훈 이경원 기자 alley@kmib.co.kr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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