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점수도 인플레이션?…은행 퇴짜 급증, 불법사금융 내몰릴판
직장인 김지환(43)씨는 최근 카드사에서 연 10% 수준의 금리로 1000만원을 급히 빌렸다. 김씨의 신용점수는 870점대로 과거 기준으로는 10등급 중 3등급에 해당한다. 고신용자로 분류되지만, 시중은행 대출 문턱을 넘지 못해 더 높은 금리를 감수하고 제2금융권에 손을 벌린 것이다.
시중은행에서 퇴짜를 맞고 제2금융권으로 발길을 돌리는 고신용자가 늘고 있다. 10명 중 4명이 신용점수 900점(1000점 만점)을 넘는 신용점수 ‘인플레이션’ 현상 때문으로 풀이된다. 높은 신용 점수가 더 이상 대출을 보장해주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최근 가계대출 급증세와 높아진 연체율로 은행이 대출 심사를 더욱 깐깐히 하고 있어 향후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한층 까다로워질 전망이다.
19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7월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은 이들의 신용점수(신규 취급액 기준)는 은행별 평균 909~947점을 기록했다. 평균 신용점수는 지난해 연말 895~922점에서 올 들어 지속적으로 올랐다. 지난 5월부터는 5대 은행 모두 신용대출자의 평균 신용점수가 900점을 넘었다.
신용평가사 코리아크레딧뷰로(KCB) 기준으로 1등급은 942~1000점, 2등급은 891~941점, 3등급은 832~890점이다. 신용등급을 기준으로 보면 은행권 평균 대출등급은 2등급 상위권 수준이다. 고신용자(1~3등급)도 2등급 중·하위권부터는 은행 대출을 받기가 쉽지 않게 된 것이다.
KCB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신용점수 900점 이상을 보유한 금융고객은 전체의 41.9% 수준이다. 이 비중은 2019년 말 38.6%, 2020년 말 40.4%로 높아지고 있다. 신용점수 관리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한 가운데, 통신비·국민연금·보험료 등의 납부 내역을 신용평가사에 등록하면 신용점수가 올라가면서 금융소비자들의 신용점수가 전반적으로 올라간 것으로 해석된다.
고신용자가 늘어나는 현상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돈을 내주는 은행 입장에선 신용점수의 변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은행은 자체 신용평가 모델을 통해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용점수가 높은 고객이 워낙 많아 신용점수는 대출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오름세를 보이는 연체율도 은행 대출을 더욱 깐깐하게 하고 있다. 이날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은행의 원화 대출 연체율은 지난 7월 말 기준 0.39%다. 한 달 전(0.35%)보다 0.04%포인트 올랐다. 1년 전에 비해선 0.17%포인트 상승했다.
은행 대출 문은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최근 가계대출 급증세를 막기 위해 금융당국이 대출 조이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5대 시중은행의 지난달 말 가계대출 잔액은 680조8120억원으로 7월 말(679조2208억원) 대비 1조5912억원 늘었는데, 이는 2021년 11월(2조3622억원) 이후 1년9개월 만에 최대 증가 폭이다. 이러자 금융당국은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과 특례보금자리론 요건을 강화했다. 또 변동금리 상품에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강화해 대출 가능액을 줄인다는 방침이다.
고신용자가 은행에서 밀려나면 저신용자의 돈줄이 마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은행에서 대출을 거절당한 고신용자가 저축은행이나 카드사 등 2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경우 2금융권을 주로 이용한 중·저신용자가 불법 사금융으로 밀려날 수 있어서다.
이런 가운데 제도권 금융기관의 마지노선인 대부업체는 대출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올 상반기 대부업체 신용대출 규모는 6000억원 수준이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연간 대출액이 1조원 안팎에 그친다. 지난해 전체 대출(4조1000억원) 대비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드는 것이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은행이 대출을 줄일 경우 고객의 연쇄 이동으로 결국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을 이용하는 저신용자가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릴 수 있다”라며 “연 20%인 법정 최고금리의 현실화 등을 통해 대출 영업에 숨통을 틔워줘야 서민들이 제도권 금융 내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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