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정기고사 시험 문제, 이렇게는 안 됩니다

이준만 2023. 9. 1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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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표현 지양하고, 제대로 된 서술형 문항 출제해야

[이준만 기자]

 평가문항 분류표
ⓒ 이준만
 
2004년 여름방학 때, 교원 연수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벌써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간다. 국어 교사 30여 명이 참여한 연수였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한 분이 특강 강사로 오셨다. 그분이 하신 이야기 중, 잊히지 않는 내용이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난지라, 그분의 말씀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선생님들, 제발 시험 문제 좀 제대로 내주세요. 제가 서울 ○○고등학교 운영위원장인데요,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정기고사 문제를 검토해 달라고 해서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험 문제 발문이 너무 모호해서 저는 문제를 풀지 못하겠더라고요. 학생들이 그런 발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요즈음에는 대한민국 그 어떤 고등학교에서도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정기고사 문제를 검토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사달이 나도 보통 사달이 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또 2004년 당시 내가 근무했던 지역의 그 어느 고등학교도 학교운영위원회에 정기고사 문항을 검토해 달라고 의뢰하지 않았다. 그 교수가 운영위원장으로 있는 고등학교 교장이 좀 독특한 사람이어서,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하여튼, 그 교수의 말을 듣고 나는 몹시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정기고사 문제도 결코 서울의 그 고등학교 수준을 뛰어넘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또 내가 출제한 정기고사 문제도 역시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기고사 문제를 출제할 때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관행대로 출제를 해 왔으니, 내가 낸 문제도 그 교수가 지적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학교로 돌아와서, 내가 출제한 정기고사 문제들을 검토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랬다. 평가 담당 교사에게 부탁해서 다른 과목의 문제들도 살펴보았다. 역시 그 교수의 말 그대로였다. 모호한 표현들이 넘쳐흘렀다. 그 이후 정기고사 문제를 낼 때마다 매우 조심하고 신경을 바짝 썼다. 출제 후 최소한 서너 번 검토에 검토를 거듭했다. 그랬더니 조금씩 나아졌다.

그로부터 내가 퇴직하기까지 근 20년 동안, 내가 근무한 학교의 정기고사 기간 학교 풍경을 떠올리면 빠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시험 문제지 봉투에 붙어 있는 '시험 문제 수정 쪽지'이다. 1년에 4번 정기고사를 치르니 20년이면 80번의 정기고사를 치렀을 터이다. 그중, '시험 문제 수정 쪽지'가 등장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아마 몇 번쯤은 있었으리라. 하지만 '시험 문제 수정 쪽지'가 등장한 적이 압도적으로, 현저하게 많았음이 틀림없다. 심지어 시험 종료 10분 전쯤, 담당 교사가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시험 문제를 수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발문의 모호성'과 잦은 '시험 문제 수정' 말고도 내가 근무했던 여러 고등학교에서의 정기고사 출제 문제의 문제점은 더 있다. 그중, 내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점은 '서술형' 평가 문항이다. '서술형' 평가 문항은 '오지 선다형' 평가 문항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학생들의 깊은 사고력을 측정하기 위해 출제하는 평가 문항이다.

문제는, 이 서술형 평가 문항을 '서술형'답게 출제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문항이 제대로 된 서술형 문항인지 모르는 교사들이 많고, 설령 알고 있더라도 채점의 편의성 등을 생각하여 서술형다운 서술형 문항을 출제하지 않는 풍토가 분명 있었다.

'있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한 까닭은, 내가 근무했던 교육청의 경우 코로나19 유행 시기에 정기고사에서 서술형 평가 문항을 사실상 없애도 되는 학업성적관리 시행 지침을 내려보냈기 때문이다. 정기고사에 의무적으로 포함해야 했던 서술형 평가 문항을, 수행평가를 통해 실시해도 되도록 지침을 수정했다. 그 결과 내가 퇴임 직전 근무한 고등학교에서는 한두 과목 빼고, 정기고사에서 서술형 평가를 없앴다.

정기고사에서 반드시 서술형 문항을 출제해야만 했던 시절,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서술형 문항들은 대부분 '단답형 문항'이었다. 서술형 문항을 학문적, 전문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또 고등학교의 정기고사에서 학문적 정의에 꼭 들어맞는 형태의 서술형 평가 문항을 출제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한 문장 이상으로 답안을 작성하게 하되, 단순히 배운 내용을 암기해서 작성하지 않도록' 출제하면 고등학교 정기고사 수준에서 요구하는 서술형 문항의 요건을 충족한다. 헌데 많은 경우 지키기 그리 어렵게 보이지 않는,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알고 그러는 경우도 있고 몰라서 그러는 경우도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수필의 특성, 다섯 가지를 서술하시오. [국어 교과]
- <보기>와 같은 정책을 통해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인 왕은 누구인지 서술하시오. [역사 교과]
- (      ) 속의 네 단어를 적절하게 배열하여 완전한 문장을 만드시오. [영어 교과]

위의 국어 교과와 역사 교과의 평가 문항은 단답형 문항이고 영어 교과의 평가 문항은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은 선다형 문항이다. 그러면 왜 이런 평가 문항들이 서술형 문항이라고 버젓이 고등학교 정기고사에 출제될까? 첫 번째 이유는 정기고사 문제 결재선이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아서이다.

고등학교 정기고사 결재선은 대개 '평가 담당 교사-부장교사-교감-교장'이다. 정기고사 문항 검토 시, 결재선에 있는 담당자들은 정해진 시험 문제지의 형식적인 측면을 잘 지켰는지를 주로 검토한다. 시험 문제의 내용적인 측면을 검토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위와 같은 문항들이 서술형이라며 출제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설령 결재선에 있는 누군가가 문항의 문제점을 지적했더라도 출제한 교사가 본인이 책임진다며 문제를 수정하지 않고 그냥 출제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꽤 많다.

이런 지경이라면 굳이 서술형 평가 문항을 출제할 까닭이 없다. 선다형 평가 문항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학생들의 사고력을 높일 수 없다. 학생들이 배운 내용을 달달 외기만 하면 내신 성적을 좋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창의성'이 강조되고 요구되는 4차 산업혁명 시기를 살아내야 한다. 그러려면 학교에서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수업을 바꾸고 평가를 바꾸어야 한다. 교사 주도의 일제 강의식 수업에서 벗어나 학생 활동 중심 수업을 해야 한다. 오지선다형 평가를 없애고 서술형 평가를, 나아가서는 논술형 평가를 시행해야 한다. 수업을 바꾸고 평가를 바꾸면 지금 여러 가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학교를 치유할 바탕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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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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