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드라마 ‘무빙’과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들
만약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면 미국을 권위주의 국가로 변질시키려 할 것이다. 뉴스쿨 대학원의 석학인 아라토 교수는 전 세계에 만연한 이러한 추세를 ‘포퓰리스트 헌정주의’라 부른다. 즉 이들은 자신만이 국민을 대표한다면서 행정부를 장악한 후에 의회, 정당 등의 정치 파트너를 적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기존 ‘자유 민주주의’ 제도를 공격하면서도 동시에 빈번하게 자의적으로 법과 규범을 동원한다는 사실이다. 서로 물과 기름인 포퓰리즘과 헌정주의, 두 단어가 기이한 괴물의 모습으로 결합해서 등장하는 셈이다. 아라토 교수가 자신의 책 개정판을 낸다면 한국의 사례를 첨가할 유혹을 느낄 지도 모르겠다. 역시 초현실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대한민국은 학자들에게는 학문의 넷플릭스이자 디즈니플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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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드만과 박정훈의 양심선언
헌법적 가치 지키려는 노력들
드라마에 있을 법한 초능력자
현실에도 있다는 사실 말해줘
」
하지만 다행히 미국과 한국은 아직까지는 행정부를 넘어 입법부, 사법부 전반에까지 이 권위주의 경향이 만연한 단계로 치닫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를 억제하고 법치와 민주주의 규범을 지키는 잠재적 초능력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빈드만과 박정훈 말이다.
빈드만? 미국인들도 이제는 그를 잊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영웅이다. 트럼프는 미국 스타일의 대선 북풍 공작을 위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바이든과 그의 아들 헌터에 대한 거짓 발언을 하게 압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하지만 NSC(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빈드만 중령은 이를 폭로하여 트럼프는 결국 탄핵 소추를 당하였다. 그 용기 있는 양심선언으로 인해 전쟁 영웅 빈드만은 졸지에 백악관에서 쫓겨나고 결국에는 수십 년간 동고동락을 해온 군복을 벗어야 했다.
사실 트럼프는 임기 동안 빈드만이 있던 NSC는 물론이고 법무부, FBI, 주 정부, 심지어 미디어 등에 온갖 자의적 압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미국에는 빈드만 중령 같은 평범한 초능력자들이 망가져가는 황혼의 자유주의 제도를 마지막으로 수호하고 있다. 마치 무빙 드라마(원작은 강풀 작가)의 소시민 초능력자들처럼 말이다. 빈드만 중령은 특정 정당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헌법을 보호하고 지키는 공통의 서약”을 강조하곤 한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헌법적 행위’(constitutional act)라고 부른다.
박정훈? 수해 실종자 수색 작업 중 순직한 채모 상병 사건에서 외압에도 불구하고 엄정하게 수사하고 용기 있게 증언한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말이다. 그는 그저 헌법적 정신에 따라 평소 지론대로 ‘공명정대’하게 수사했는데 어이없게도 항명 혐의로 입건되고 해병대 직위에서 보직 해임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군사법원은 의연하게 법적 논리에 따라 그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한국도 행정부의 권위주의 경향(포퓰리스트 헌정주의)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억지력이 작동하는 셈이다. 박정훈 대령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국가에 충성스런 해병대, 정직한 해병대’를 강조한다. 나는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는 이러한 ‘군인다운 군인’과 법원의 초능력 행위도 ‘헌법적 행위’라 부르고 싶다.
물론 일각에서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다소 불편함을 느낄지 모르겠다. 사실 한국에서 이 단어는 너무나 심하게 오염이 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단어를 극단적 세력들이 경쟁과 공존의 상대를 절멸시키는 데 악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미국 학계에서 쓰이는 ‘자유주의(헌정주의)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이는 공정한 선거는 물론이고 민주적 과정을 위한 자유로운 권리 보장 및 법치 등이 지켜지는 민주공화국을 지칭한다.
미국과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보수와 진보 누가 집권하든 이 공통의 가치와 제도를 더 견고하게 쌓는 일이다. 하지만 지난 문재인 행정부와 민주당은 이 과제에 충실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내로남불’ 단어를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시켰다. 나아가 지금 윤석열 행정부는 자유주의 헌정주의 민주주의의 모든 주춧돌들을 아무 부끄러움 없이 포크레인으로 파헤치고 있다. ‘검찰통치’라는 단어도 조만간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될까 걱정이다. 그래서 나는 ‘깨어보니 선진국’ 담론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진영에 따라 공통 규칙과 규범이 달라지지 않고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나라가 곧 선진국이다.
김형남 군 인권센터 사무국장의 감동스러운 책, 『군, 인권 열외』는 진정한 선진국이란 무엇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책에 나오는 한 유가족은 다음과 같이 통곡하며 질문한 적이 있다. “내 아들의 나라는 대체 어디인가?” 나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빈드만과 박정훈이 서 있는 곳, 거기에 나라가 있다고 말이다. 자유와 법치는 교과서나 기념사에만 존재할 때 죽은 단어가 된다. 빈드만과 박정훈처럼 ‘헌법적 행위’를 실천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그들의 ‘무빙’에서 희망을 본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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