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태운 뒤 마주한 치명적인 아름다움

김성호 2023. 9. 1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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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41] <어파이어>

[김성호 기자]

 
▲ 어파이어 포스터
ⓒ M&M 인터내셔널
 
공자는 사람 나이 예순을 가리켜 이순(耳順)이라 하였다. 직역하자면 귀가 순해진다는 뜻인데,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바깥의 소리를 들어도 거슬리는 것이 없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본뜻을 이해하게 되는 경지라고 풀이하고는 한다. 모든 이가 예순이 된다고 이순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물론 아니다. 꾸준한 수양으로 스스로를 완성시켜 가다보면 마침내 만나는 경지가 곧 이순이다. 거슬리는 것 없이 순리와 닿는 것, 그렇다면 얼마나 평안하겠는가.

1960년생으로 이제 63세가 된 크리스티안 페촐트다. 2020년 <운디네> 발표 이후 새로운 작품을 구상했으니 그 영화가 바로 신작 <어파이어>다. 꼭 이순이 된 나이, 평생을 읽고 쓰고 영화를 만든 끝에 마침내 거장의 반열에 오른 페촐트의 관심은 어느 어린 글쟁이의 성장과 그 과정 곁에서 만난 인연, 그리고 그를 비켜간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스스로 기자였고, 다시 평론가였다는 사실을 종종 이야기하는 그다. 기자와 평론가를 거쳐 영화감독에 이른 경력은 그가 가졌을 꿈과 열망을 은근히 내비치는 듯도 한데, 드디어 제 영화 속에 미숙한 글쟁이를 등장시키니 사람들은 바로 그가 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닌지 관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기에 이른 것이다.
 
▲ 어파이어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곤두선 젊은 작가의 타는 듯한 여름

영화는 어느 여름 독일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다. 젊은 작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 분)은 친구 펠릭스(랭스톤 우이벨 분)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기분 좋게 울려퍼지는 음악과 창문 너머에서 들이치는 햇살이 절로 마음을 가볍게 할 것만 같은 바로 그즈음, 차가 멈춰서고 이들은 제게 문제가 생겼단 걸 깨닫는다. 오가는 차 없는 한적한 도로다. 이들은 짐을 내려서는 목적지까지 걸어가기 시작한다.

겨우 도착한 곳은 펠릭스의 부모가 구입한 별장이다. 발트해 해변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적한 집으로, 주변을 둘러싼 숲이 한적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레온과 펠릭스는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문제와 봉착한다. 집에 다른 사람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 이들에 앞서 별장을 쓰고 있었다는 얘기다. 펠릭스가 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직장 동료의 딸이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잔뜩 짜증이 난 레온은 펠릭스에게 성질을 부리고, 그는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그를 달랜다.

레온은 작가, 펠릭스는 사진가다. 둘은 각자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레온은 이곳에서 제가 쓴 소설을 마무리하고 며칠 뒤 도착할 출판사 사장과 만날 것이다. 사장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 분)는 레온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가 쓴 작품은 좀처럼 출판 승인이 떨어지지 않는다. 레온은 이번에야말로 책을 내겠다는 일념으로, 지난 몇 달 간 헬무트에게 보일 소설을 퇴고해왔다. '클럽 샌드위치'란 제목의 소설로, 레온의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침 펠릭스도 이곳에서 사진작업을 하고 포트폴리오를 완성하려 하는데, 둘의 입장이 딱 맞아떨어져서 별장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 어파이어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그 시가 낭독되는 아름다운 순간

그런데 일은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 레온에게 더욱 그렇다. 별장의 큰 방은 먼저 온 나디아(파울라 베어 분)가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애인처럼 보이는 데비트(엔노 트렙스 분)오 함께 방을 쓰는데, 밤마다 들려오는 소리가 레온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작업을 할 시간도 촉박한데 펠릭스와 함께 방을 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옆방의 불청객도 거슬리는데, 저 말고 다른 셋은 쿵짝이 잘 맞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해변으로 놀러다니니 레온은 혼자서 온갖 짜증을 내버리는 것이다.

영화는 레온과 펠릭스, 나디아와 데비트가 함께 보내는 며칠을 흥미롭게 담아낸다. 청춘의 미숙한 마음들이 서로 뒤엉키는 나날이다. 때렸다가 보듬고 당기다가 밀어내며 기대했다 실망하는 여러 사건들이 그들의 시간을 기억으로 채색한다. 레온은 대개 무례한 쪽이다. 청춘의 흔한 모습처럼 능숙하고 여유롭지 못하여서 비꼬거나 삐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친절한 친구들은 레온에게 거듭 손을 내밀어 그가 홀로 떨어져 화만 내지 않도록 돕는다. 그렇게 미묘한 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기다리던 헬무트가 도착한다.

헬무트는 나디아를 한 눈에 알아본다. 처음엔 그녀의 친절 때문이었을 테고, 나중엔 순결한 열정 때문이었을 수 있겠다. 나디아는 헬무트 앞에서 제가 문학을 전공했다고 털어놓는다. 헬무트는 그녀에게 어떤 논문을 썼느냐 묻고, 나디아는 하이네라 답한다. 그중 특별히 좋아하는 시를 이야기해달라 하자 나디아는 '아스라'라 답한다. 헬무트가 기억을 더듬어 아스라의 싯귀를 만지작거리고 나디아가 조심스럽게 이를 제 길 위에 올리는 모습이 매혹적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영화 가운데 아스라가 낭독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어파이어> 안에 담겼을 테다.
 
▲ 어파이어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모든 것을 태우고서야 마주하는 세상

나는 오래 전 절판된 김남조의 훌륭한 시선집 <그대들 눈부신 설목같이>에서 아스라를 처음 만났다. 치명적 오역에도 김남조 특유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묻어난 이 시는 얼핏 유치하지만 실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 시가 낭독되는 순간을 레온을 제외한 모든 이가 아름답다 여긴다. 타오르는 붉음은 누구에겐 아름다움을 허락하지만 또 누구에겐 타는 듯한 목마름만 안기는 법이다.

영화는 마을을 덮친 산불과 헬무트를 쓰러뜨리는 질병과 레온에게 다가온 복잡하고 거센 감정들을 한 데 풀어놓는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남녀는 엇갈리는 운명을 마주한다. <어파이어>는 열망에 사로잡힌 비좁은 청년이 제게 닥쳐온 위기로부터 성장하는 이야기다. 그 주변에는 그에게 거듭 손을 내미는 친절한 이들이 있고 그중 몇은 마침내 그가 손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운이 좋은 이다.

레온은 마침내 모든 것이 타버린 뒤에야 제대로 된 글을 쓰게 된다. 이순이 되어 이 이야기를 준비한 페촐트는 어리석고 미숙했던 레온의 이야기로부터 무엇을 보여주고 팠던 걸까. 어떤 아름다움을 만나기까지 우리가 겪어내야만 하는 실패와 좌절과 절망들을, 또 그를 구하는 친절한 손길들을 이제는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아닐까.
 
아스라

하인리히 하이네

날마다 석양이 지는 무렵이면
아름다운 술탄의 딸은
하얀 물줄기 찰랑이는
분수가를 오르내린다

날마다 저녁이면 젊은 노예는
하얀 물이 찰랑이는 분수대 앞을 지켰다
창백해져가는 모습으로

어느날 저녁 공주는 노예에게 다가가
빠르게 말을 건넸다
너의 이름을 알고 싶구나
너의 나라와 종족도

노예가 말했다
제 이름은 모하메드
예멘 사람이고
종족은 사랑을 하면 죽고 마는 그 아스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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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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