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태우 나쁘지 않다"…극단 정치와 비교되는 '노태우 리더십'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의 주역이면서도 6·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민주화의 길을 텄고, 재임 시절 타협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극단의 대립이 일상화된 요즘 정치권과 비교되곤 한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인 정해창(86) 노태우센터 이사장이 최근 『대통령 비서실장 791일』이란 회고록을 펴냈다.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 차관과 장관을 지낸 저자는 1990년 1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직했다. 정 이사장은 당시 남긴 8권의 업무일지를 바탕으로 7년 3개월을 집필에 매달린 끝에 책을 완성했다. 저자 스스로 “현대판 ‘승정원 일기’를 남기겠다”는 각오로 쓴 만큼 책에는 훗날 한국 정치사의 변곡점이 되는 6·29 선언과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힌 북방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1937년생으로 팔순을 훌쩍 넘긴 옛 참모는 836쪽의 방대한 기록을 남기며 책머리에 “잘못에 대한 질책은 아무리 따가워도 달게 받아야 할 일이었다”면서도 “그 시대 국민과 함께 이룩한 노태우 대통령의 업적까지 무시되거나 폄하되었다”고 기록했다. 2021년 10월 서거한 고인의 2주기를 앞두고 ‘공과(功過)’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한 것이다.
책에는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대통령 당선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노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정의당은 125석만을 얻어 과반 획득에 실패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였다. 위기감을 느낀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 김종필(JP)의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1990년 1월 ‘3당 합당’을 통해 221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만들어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런 뒤에도 야당과의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회고록엔 노 전 대통령이 1991년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조찬 회동을 가진 대목도 등장한다.
책에는 “노 대통령은 생활물가 발표, 유엔 가입, 걸프전쟁 의료진 파견 문제 등 당면 문제를 김 총재에게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였다”며 “김 총재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수많은 사항을 적어와서 하나하나 상대의 의견을 묻거나 정부의 배려를 요청했다”고 기록돼 있다. 저자는 회동 이틀 뒤 국회의 걸프전쟁 관련 군 의료진 파견 동의안 가결(찬성 223, 반대 9, 기권 1)을 언급하며 “상호 이해를 증진해 몇 가지 중요한 협조를 얻은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설득과 타협의 정치를 이어간 노 전 대통령을 두고 당시 ‘물태우’라 부르는 이들도 늘어났다. 권위주의 정치에 익숙한 국민에게 노태우식 정치는 낯설었던 셈이다. 정 이사장은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이 “물태우란 평가는 나쁠 것이 없다. 오히려 시대적 상황에 대한 처방으로는 물의 미지근함이 정답”이라 밝힌 일화를 전했다.
노태우 정부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중앙일보에 “노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여소야대 국면에서 정치를 살아 움직이게 하였다”고 평가하면서도 “그 시대엔 야당 역시도 협치의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처럼 무조건 발목을 잡거나 탄핵을 함부로 추진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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