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막노동 뛰다가 고향으로... 아버지의 한 마디

손광모 2023. 9. 16.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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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노동권익센터 2023년 제1회 감정, 비정규직 노동자 수기 공모전 '최우수' 작품

부산노동권익센터가 올해 개최한 2023년 제1회 감정, 비정규노동자 수기공모전에서 16편의 작품이 당선됐다. 일용직 건설노동자와 시설관리노동자, 대리운전, 콜센터 노동자, 상담 노동자 등 다양한 직종의 비정규직, 감정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이다. 이들 노동자들의 일과 삶,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보다 나은 세상을 바라는 소망이 담겼다. 당선한 공모작을 <오마이뉴스>에도 게재한다. <기자말>

[손광모 기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공에 푸념한다. 지난해 여름, 난 생애 처음으로 들어간 직장을 관뒀다. 꼬박 3년 만이었다. '몇 월 며칠 부로 퇴사를 희망합니다.' 간명하기 그지없는 사직서 한 장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들이 담겨 있었다. 끝났다는 후련함과 좀 더 버티지 못했다는 후회와 미련,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내 길이 아니었겠지'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기는 참 어려웠다. 후련한 마음은 퇴사 한 달만에 아주 옅어졌고, 후회와 '이제 뭐 먹고 살지'라는 불안이 앞날을 가렸다. 인생 얼마 산 것 같지도, 그렇다고 조금 산 것 같지도 않은 30대의 초입에 들어선 나에게 지난해 여름부터 겨울까지는 여러모로 특별한 시간이었다.

막노동
 
 건설현장.
ⓒ pixabay
 
"손 반장, 일 잘하네. 내일도 인력사무소에 얘기해서 여기로 출근해."

지난해 7월부터 나는 소위 '노가다'(막노동)를 했다. 내게 노가다는 금역의 직업이었다. 어린 시절 다섯 식구를 건사하기 위해 아버지가 했던 일. 그마저 허리병을 얻어 도중에 그만두게 된 일. 노가다는 내게 친숙하면서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누나에게는 말할 수 있었지만, 차마 어머니에게는 떳떳이 말할 수 없는 일.

하지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혼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생활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미처 여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알량해지는 통장잔고를 보면서, 좀 더 현명하게 퇴사하지 못한 몇 개월 전의 나를 후회했다.

이제 뭐 먹고 살지도 다시 정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없었다. 자발적으로 퇴사하면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다니. 그저 자발적이라고 줄여버리기에는 아무래도 억울한 마음이 앞섰다. 도저히 버티기가 어려워 떠난 것도 나의 자유의지라고 봐야 할까? 고용노동부는 어떤 사람이 어쩌다 일을 그만뒀는지, 그만둔 이후 생활은 어떠한지 등 그 구구절절한 사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실업급여는 누군가에게는 생명줄과도 같고, 또 누군가에게는 좀 더 안정된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하는 '믿는 구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말 잘 듣는 노동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직장을 때려치우는 상상을 하는 사람도 '자발적 퇴직'이 아니라 '권고사직' 처리를 받기 위해 퇴직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좋게 좋게' 일하고 나가곤 한다. 실업급여 3개월이면 못해도 500만 원인데. 왜 나는 그게 비굴함이 아니라 현명함인 걸 몰랐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푸념이 또 쌓인다.

그런 내게 노가다는 참 딱 맞는 일이었다. 목표는 90일이었다. 일용직 고용보험 가입 일수가 90일이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일하지 않는 날은 앞으로의 진로를 탐색하리라. 쿠팡에서 안전화와 목장갑, 여름 작업복, 목토시, 각반 등을 사고,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을 받는 데까지 20만 원이 들었다. '이틀이면 본전 뽑는다!' 첫 출근 이후에도 '이 정도면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긴 했지만, 4시 반 정도면 마쳤고, 무엇보다 일당이 바로바로 통장에 꽂히는 쾌감은 월급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여타 직장인이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소개비와 2대 보험비를 제하고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12만~13만 원. 계산해 봤을 때, 평일 다 일하고, 토요일 몇 번만 일하면, 경력이 일천한데도 불구하고 이전 직장에서 받는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나는 무엇하러 악착같이 대학에 가고, 힘겹게 취업했을까. 이것이 딱 1~2개월 차 초보의 생각이었다.

"이 일 계속할 거야? 젊은 사람이 왜 노가다를 해?"

노가다 판에서 20~30대는 희귀하다. 나이 지긋한 수십 년 경력의 반장님들은 쏘아붙이듯 물어본다. "잠시 하는 거예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잠시만 하고 다른 일 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나름 괜찮은데, 왜 그렇게 물어볼까. 겨울이 들어설 때쯤, '깔깔이'가 뭔지 다시 안 물어봐도 될 때쯤, 초보티를 갓 벗었을 때 나는 반장님들의 조언이 텃새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저녁상이 이해됐다
 
 공사 현장에서 쓰이는 도구
ⓒ 픽사베이
 
사람의 몸은 참 신비롭다. 처음의 호기롭던 계획과는 달리 점점 일하는 반장님들과 일상이 비슷해져 갔다. 다음의 커리어를 위한 수단이었던 노가다가 생계를 위한 수단이 돼 갔다. 일 마치고 저녁으로 반주로 소주 한 병은 내일 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늘 시큰한 땀냄새와 술냄새가 함께였던 아버지의 저녁상이 이해가 갔다. 술을 좋아해서 매일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매일같이 무엇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의지가 있거나 혹은 그 무엇이 일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어야만 했다. 직장인의 커피와 같이 노가다꾼에게는 소주가 필요했다.

빨리 일어나기 위해서, 피로를 씻기 위해서 퇴근 후 술 한잔이 익숙해져 갈 무렵, 문득 '이력서에 경력으로 노가다 경험을 쓸 수 있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에 한 현장에서 최대 7일까지 일할 수 있는 일용직 경험을 이력서 경력 칸에 모두 다 쓰려면 몇 칸이 필요할까. 하루 일한 곳도 경력이긴 한 걸까.

자기소개서에서 노가다 경험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클리셰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뭐 먹고 살지'라는 불안도 일당과 소주 한 잔에 씻겨져 내려간다. 노가다꾼은 오늘 먹고살 걱정을 덜어둔 대신, 앞으로 뭐 먹고 살지도 잊어버린다. 자식만이 유일한 미래였던 아버지는 많이 일하고 돈 많이 받을 때를 참 좋아했다. 꼭 소주 한 잔씩 비우면서.

"손 반장, 이곳저곳 일 다니지 말고 여기 고정으로 들어와."
"진짜요? 고정이면 좋죠. 그런데 몇 개월 이렇게도 써요?"
"몇 개월? 3년은 해야지. 그래야 여기 마칠 때쯤 딴 데 가지."

3년. 딱 내가 첫 직장을 다닌 만큼이었다.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다. 노가다 3년 이후에 무엇이 남을까. 몸 쓰는 일이 체질에 맞는 것도 같은데, 혹 제대로 건설 직종에 뛰어든다면 어떨까. 여러 고민을 하던 중 눈발이 매섭게 휘날리는 겨울이 찾아왔다. 늘 나를 많이 챙겨주셨던 마음씨 좋은 아버지뻘 반장님의 한 이야기가 내 결정에 도움을 줬다.

"야, 너 조심해야 해. 어디 가서 반장이 일용직 애들한테 뭐 시키잖아? 그거 하란 대로 다 하지 말고 좀 위험하다 싶으면 못 하겠다고 버텨. 괜찮아. 어차피 일용직인데. 야, 너 사고가 왜 나는지 알아? 일할 줄 모르는 반장이 반장 달아서 뭣 모르고 일용직 애들한테 시키니까 그런 거야. 그런 경우 많아. 특히 겨울에는 얼지 말라고 땅에 보양을 해두거든. 거기를 피해 가라고 알려줘야 하는데 그냥 '야. 리어카 가져가서 가지고 와' 하다가 푹 빠지고...."

많은 사람들이 노가다는 아무나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전문 노가다꾼'까지도 자신이 하는 일을 어쩌다 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하고 있는 젊은 친구에게 안타까운 마음에 "잠시만 하고 가라"고 말한다. 마치 내가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하지 말라며 없는 형편에 굳이 굳이 대학을 보냈던 우리 부모님처럼.

그러나 짧은 6개월 동안의 경험이지만, 건설 직종이 그저 노가다라고 낮춰 부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몸 건강하다고 뛰어들었다가 나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 있었다. 노가다는 어떤 일보다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가다 일은 책이나 말로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노가다 판에서 수년 구르다가 잔뼈가 굵어질 때쯤 자동적으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장기적인 미래의 목표로 삼기에는 너무나 작고 불투명한 일이었다.

각자의 사연 그리고 나의 사연

일하면서 만난 여러 '반장님'들은 각기 저마다 사연을 갖고 노가다판에 흘러 들어왔다. 30년 전 왕년에 잘 나가는 중소기업의 대표이사였다던 반장님, 코로나로 가게가 망해서 들어온 반장님, 딱 2년만 해야지 하다가 일용직이 적성이 맞다는 걸 깨닫고 8년째 하는 반장님. 딱히 뭐가 되고 싶은 게 없어서 군 전역하고 나서 5년째 노가다를 하고 있다는 20대 반장님까지. 이들과 일하는 건 퍽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특히 나이 든 반장님일수록 노가다판에서 일종의 '방황'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반장님들은 가족을 건사하는 어엿한 가장들이다. 그런 반장님들에게서 가족을 빼고 '스스로'에게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똑같은 돈을 받아도 일을 잘하는 반장님을 인정하고, 그래서 더 일을 잘하려 하고, 또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에 있어서 서로서로 언성을 낮추지 않는 반장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반장님들의 자존심은 그래도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는 나의 일, '노가다'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비록 주변에서 천시하고, 스스로도 어디 가서 떳떳하게 말하지 못 하지만 말이다.

2023년이 되면서 나는 경기도 일산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왔다. 건설 직종은 아니지만, 또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또다시 학교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됐습니다."

3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소주 한 잔 하면서 퇴사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짤막하게 전했다.

"그래. 서울 생활 쉽지 않제?"

짠. 소주잔이 부딪치고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무뚝뚝한 부자 사이로 대화 소리보다 텔레비전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그날은 평소보다 술병을 조금 더 많이 비운 듯했다. 특별한 대화를 했었던 건 아니지만, 비워가는 술병에 나는 잘 알지도 못했던 아버지를 어렴풋이나마, 조금은 이해한 것 같았다.
 
 소줏잔.
ⓒ 부산노동권익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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