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저는 세상과 작별합니다"…조력자살 일주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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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정오쯤 저는 세상과 작별합니다.”
집에 모인 이들이 손뼉을 쳤다.
파킨슨병으로 4년째 투병 중인 밥(65)은 조력자살 전날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그가 사는 미국 워싱턴주에서는 6개월 내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의사 조력자살이 가능하다.
이미 탈수증으로 체중이 줄어 몸은 깡말랐고 굳어졌다. 운동장애ㆍ치매ㆍ환각으로 고생한 지 오래다. “갈퀴로 뼈 한 군데를 긁어 내리는 듯한 통증”이라고 말한다. 종이신문을 챙겨 읽고, 대선 기상도에 귀를 쫑긋하며 여전히 세상사에 관심이 많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매혹적인 삶이었다. 엘튼 존, 베르사체, 실베스터 스탤론의 욕실을 디자인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이뤘다. 15세에 가출해 우드스톡에 갔고 펑크록 멤버들과 어울렸다. 집에는 아직도 곳곳에 기타가 걸려 있다. 굳어진 손가락으로 지금도 더러 기타를 쳐본다. 팔뚝엔 돛단배를 그리고 ‘꿈을 좇아라’ 문신을 새겼다. “못해 본 이유는 안 해 봤기 때문, 그러니 그냥 해”를 신조로 살아왔다. 밥은 오랜 투병에도 유머를 잃지 않은 채 질병과 죽음에 맞서려 한다.
삶의 마지막 날을 스스로 정했고, 가족ㆍ친구들과 작별하기로 했다. 2013년 베니스영화제 특별 심사위원상을 받은 호주의 영화감독 아미엘 코틴-윌슨을 중심으로 오스카상을 받은 로버트 매켄지(사운드 디자인)와 니콜라스 베커(음악) 등이 나서 그의 마지막 일주일을 기록했다. 열화상 카메라를 사용해 사망자의 몸에서 나오는 열을 촬영하는 ‘트레이스(TRACES)’라는 프로젝트에서 여러 해 일한 코틴-윌슨은 프로젝트와 관련해 1500개의 호스피스에 연락하다가 밥의 전화를 받게 됐다. “영화 제작을 위해 마지막 일주일을 함께 지내면 ‘트레이스’에 참여하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가 마을을 산책하며 이웃과 작별하고, 인공지능 스피커와 퀴즈 놀이를 하며 씩 웃는 장면을 가까이서 담았다. 밥은 이혼한 아내와도 상징적 재결합을 했다. 보스턴에서 암투병 중인 아내는 “내가 갈 때 도와줘야지. 다시 만나”라고 화상통화로 인사한다. 캘리포니아의 아들은 “감당할 수 없다”며 아버지의 죽음에 입회하기를 거부했는데,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아들과 마지막 전화 통화를 마친 뒤 바닥에 쓰러져 엉엉 우는 밥의 모습이다.
사망 당일 의사의 최종 질문에 “환불되나요?”
죽음을 결정한 것에 두려움과 망설임도 있지만 "언젠가 누군가는 너(파킨슨병)를 데려갈 거야. 내 아이 하나라도 끌고 가면 다시 와서 널 데려가겠다"고 말하는 기개도 있다. “단연코 정말 오늘 하고 싶냐”는 사망 당일 의사의 최종 질문에 “환불되나요?”라며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그는 자기 집 침대에서 자신이 정한 날에 의사가 주는 4가지 약물을 마시고 친구ㆍ가족들과 건배한 뒤 편안히 잠든다. 카메라는 잠든 채 규칙적으로 숨을 뱉는 그를 한참 비춘다. 침대 옆의 반려견이 문득 놀란 듯 짖는다. 당사자 동의 하에 촬영한 다큐멘터리라지만 이래도 괜찮은가 윤리적 질문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영화 ‘지상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원제 Man on earth)’은 21일까지 경기도 고양 메가박스 백석벨라시타 등지에서 열리는 제15회 DMZ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아시아 첫 공개된다. 16일 첫 상영은 매진됐다. 국내에서는 2018년 ‘연명 의료결정법’ 도입 후 26만 명이 연명 의료 중단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의사 조력자살에 대해서는 “자살을 포장하는 것”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높인다” 찬반이 팽팽하다. 프랑스에서도 지난해 9월 장뤼크 고다르 감독이 의사 조력자살로 타계하자 관련 법제 검토를 위한 토론에 들어갔다.
“인간성을 지키고 존엄함을 잃지 마세요. 삶에 만족하세요.”
모두가 이렇게 때와 장소를 정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같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생을 어떻게 돌아볼 것인가, 가까운 이들과 쌓은 애정과 회한은 어떻게 풀 것인가, 나는 누구와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을까. 97분짜리 진짜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이다.
영화 속에서 무대에 앉은 밥은 프로젝터의 빛을 바라보며 말한다.
“인간성을 지키고 존엄함을 잃지 마세요. 삶에 만족하세요.”
박수가 터지고 조명이 꺼졌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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