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서로 살려는 한 가족의 파멸
[김성호 기자]
바야흐로 콘텐츠의 시대다. 특히 수백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며 드라마를 내 집 안방에서 편안하게 볼 수 있다는 건 불과 십수 년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대단한 일이다. 할리우드와 유럽, 아시아 전역에서 건너온 대단한 작품들을 우리는 정말이지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규모 있는 작품들 사이에서도 작지만 선명한 힘을 발휘하는 콘텐츠가 없지 않다. 연극 역시 그중 하나라 할 만하다. 사람이 눈앞에서 직접 연기를 해야 하고, 공연장에 든 이들만이 그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는 건 요즘 같은 시대엔 제약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연극만이 가진 선명한 장점이기도 한 것이다. 눈앞에서 열정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래 이것이야말로 연기이고 연극이 가진 힘이구나 감탄하게 되는 일이다.
▲ 뉴클리어 패밀리 포스터 |
ⓒ 극단 고래 |
'문제 많은' 가족에게 위기가 닥친다면
<뉴클리어 패밀리>는 단순한 구성의 작품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남동생으로 이뤄진 4인 가족 구성원이 각각 가진 문제를 하나씩 보여주고, 극적인 전환부에 이르러서 그 갈등을 한 번에 폭발시키는 것이다. 한국에 핵폭탄이 떨어진다는 극단적 설정으로부터 한 가족이 보여주는 뒤의 이야기가 극의 메시지라 해도 좋겠다. 말하자면 전반은 가족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나열이며, 후반은 그 문제가 빚어내는 파국이라 하겠다.
극의 첫 장면은 제법 참신하다. 보는 이의 예상을 박살내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중년의 남성(김두은 분)과 누가 보아도 한참은 어린 청년이 날 선 대화를 나눈다. 청년이 중년을 압박하고 중년은 갈수록 물러서며 저를 지키는 데 급급하다. 이들이 서로를 압박하고 또 물러나는 이유는 관객이 쉬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어서 극에 흥미를 더한다. 여기 중년의 사내가 극의 중심이 되는 4인 가족의 가장이다.
다음은 막내(사현명 분)의 차례다. 그는 오랜만에 친구를 청하여 만난 모양이다. 자주 연락하지 않은 모양인지 어색함이 감도는데, 마침내 막내는 친구에게 제가 그를 청한 목적을 밝힌다. 막내는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아직 취업도 해본 적 없는 백수다. 그렇다고 아무 노력도 않는 것은 아니라 여기저기 이력서는 계속 쓰고 있는데 서류조차 통과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청년실업이 이슈인 시대, 그러나 동시에 구인난이 심각한 한국의 사정을 고려하면 이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엇갈릴 법도 하겠다.
그 다음은 누나(이지혜 분)의 순서다. 유튜버인 그에겐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건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한 비밀로, 다름 아닌 성정체성의 문제다. 하지만 성전환 수술비가 상당해서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혹시 집에다가 이야기를 하면 한번쯤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 뉴클리어 패밀리 홍보물 |
ⓒ 극단 고래 |
한반도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디스토피아 연극
이처럼 동상이몽의 네 가족을 한자리에 앉히고, 이들에게 핵폭탄이 떨어진 뒤의 세상이라는 충격적 설정을 더하는 것이 이 극의 설정이다. 핵이 떨어진 뒤 이들의 집 안은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공간이지만, 집 문을 열고 나가면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는다는 극단적인 설정이 소개된다. 비과학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뒤의 이야기만 좋다면야 극적 허용쯤으로 넘어갈 수 있겠다. 나가면 순식간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고 안에서만 몇 날 며칠을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바로 그 순간 이들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있으니, 정부가 이들 중 단 한 명을 구해줄 수 있다는 썩은 동아줄 같은 제안을 해오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 동아줄을 잡을 사람을 고르는 작업에 착수한다.
작가가 핵폭탄이 떨어진 뒤의 세상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설정을 꺼낸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다. 그건 나머지 가능성을 단박에 차단하고 묻고자 하는 질문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핵폭탄이 떨어지고 집 밖에서의 자력생존이 불가능해졌으므로 가족들은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집중한다. 단 한 명의 구성원만 살려주겠다는 제안에 온 정신을 기울여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제안을 거부하거나 제안을 받아들여 넷 중 살아남을 한 명을 고르는 것이다. 그 하나를 고르려 한다면 대체 어떤 기준으로 고를 것인지, 또 누가 그 한 명에 들고자 할 것인지가 모두 관심을 모으게 된다. 한 명의 생존은 다른 의미로 나머지 세 명의 죽음을 뜻하기에 이들의 선택이 더욱 무거울 밖에 없다.
▲ 뉴클리어 패밀리 사진 |
ⓒ 극단 고래 |
각자도생 한국사회를 한 가족 안에 담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세상이다. 직원은 월급루팡이란 말을 자랑스럽게 떠벌이고 사장은 직원들을 착취하며 제 배만 불린다. 회사자금을 횡령하고 도망친 이들의 이야기는 뉴스지면에 수시로 오르내린다. 주주들을 농락하고 허위공시를 올린다거나 정보를 빼돌리는 기업인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공무원이며 국회의원이라고 다르지 않다. 모범을 보여야 할 이들이 잿밥에 눈이 멀어 국민을 등치는 일이 너무나도 많아서 국민들은 최소한의 기대조차 놓아버린 지 오래다.
극이 의도한 것도 그와 같은 풍경인지 모르겠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부모와 자식, 부부와 형제의 도가 알알이 부서져서 낱낱이 흩날린다. 한국사회의 이 같은 단면을 한 가족 안에 우려내어 경고하는 것, 그것이 이 극이 의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작품이 그리 잘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다. 가족 구성원 각각이 가진 문제는 한국사회의 병폐를 상징하기엔 너무나 편협하고 치우쳐 있어 충분한 자극을 던지기 어렵다. 성소수자며 가정주부에 대한 존중 없음과 실업의 문제 또한 이제는 그 자체로는 새로울 수 없는 주제다. 일례로 극은 실업자인 막내가 서른세 살까지 한 번의 서류통과도 한 적 없이 무척 많은 이력서를 쓴 사람으로 그리는데, 과연 이것이 한국사회의 청년실업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설정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 쪽에선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발버둥치는 기업들이 넘쳐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캐릭터는 보다 세상에 일찍 던져져 상처를 받고 튕겨진 이로 그려내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거의 모든 캐릭터가 이와 같아서 사회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나 아쉬움이 남았다.
<뉴클리어 패밀리>는 극단 고래의 신진연출가 지원작으로 선정된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 연극계에 어떻게든 새로운 작가가 진입하고 있고, 이 같은 시행착오를 통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부디 다음은 더 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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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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