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권력의 하수인이었다' 늙은 조폭의 후회
[이준목 기자]
김태촌(1950-2013)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조폭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인물 중 하나다. 1970~1980년대 대한민국 주먹계를 평정한 '서방파'의 두목으로 김태촌이 떨친 악명은 대단했다.
하지만 수많은 죄업의 대가로 무려 33년을 감옥에서만 살아야 했던 김태촌은 훗날 "조직폭력배의 말로는 비참하다"며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태촌은 말년에 청소년을 선도하는 강연에 다니며, 조폭이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그저 '권력의 하수인'일 뿐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해야만 했을까
9월 14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조폭의 고백, N호텔 살인청부의 진실' 편을 통하여 조폭 김태촌의 회한으로 돌아본 대한민국 범죄사를 조명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 SBS |
1986년 7월, 강남의 한 고급 안마시술소 VIP룸, 조직폭력배 서방파의 두목 김태촌은 서울고등검찰청 박아무개 부장검사와 만났다. 범죄자인 조폭과, 조폭 잡는 검사가 사석에서 한자리에 동석하는 기묘한 풍경이 연출됐다. 심지어 김태촌은 박 검사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며 극진하게 모셨다.
잠시후 두 사람을 칼과 종이를 가져오게 한 후 나란히 새끼손가락을 그어 피로 종이에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두 사람간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와 거래의 의미였다. 부탁을 한 것은 검사였고, 수락한 것은 조폭이었다. 거래의 목적은 놀랍게도 바로 '살인청부'였다. 박 검사가 김태촌에게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김태촌은 훗날인 2005년, 당시 박 검사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혈서를 어떻게 썼고 무슨 약속을 했는지, 내가 왜 이렇게 18년 동안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됐는가. 이제는 정말 진실을 밝혀야 한다." 김태촌은 박 검사와 함께한 모든 순간을 수기로 남겼다. 그 안에는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릴 만한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은밀하게 이뤄진 검사와 조폭의 부당거래. 그 안에 담긴 비밀은 무엇일까.
이야기는 김태촌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태촌은 195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훗날 그가 이끄는 폭력조직 '서방파'라는 이름은 어린 시절 거주했던 전라도 광주시 서방면의 지명에서 따왔다. 일찌감치 건달생활을 시작한 김태촌은 17살 때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렸고, 출소 후에 서울로 상경해서 본격적으로 깡패 생활을 시작했다.
김태촌은 성장하면서 1970년대 '정치깡패'로 악명을 떨쳤다. 김태촌이 26세이던 1976년 5월에는 김태촌이 폭력배들을 이끌고 당시 대한민국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의 당사와 전당대회를 습격하는 엽기적인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
그 배후에는 박정희 정권이 있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 투쟁파였고 이철승은 참여 속의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파였다. 두 사람은 신민당 총재 자리를 놓고 경쟁중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야당의 분열을 노려서 신민당 총재선거에서 'YS(김영삼)의 낙선공작'을 위한 테러를 사주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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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태촌의 서방파는 단번에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와 함께 국내 3대 폭력조직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세 조직의 공통점은, 전부 호남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지역차별로 인하여 1970년대 굵직굵직한 규모의 국가 사업가 지원들이 대부분 영남지방에 집중됐다. 호남 쪽 깡패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서울로 상경하기 시작했다. '조폭은 전라도 사투리를 많이 쓴다'는 이미지도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깡패들이 서울로 모여들고 조직들이 거대해지면서 언론에 '조직폭력배'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 조폭들의 전성시대가 열리는데 그중에서도 김태촌의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나이트클럽, 호텔, 오락실,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하며 몸집을 키우더니, 김태촌이 36세였던 1986년에는 전국 조직폭력계를 거의 평정하는 수준에 이른다.
이러한 김태촌의 상승세 뒤에는 현직 검사와의 검은 유착이 있었다. 김태촌은 전국을 평정하기 1년 전인 1985년, 서울고검 부장검사인 박아무개씨와 처음 만났다.
직접 김태촌이 수감된 교도소까지 찾아온 박 검사는 자신도 고향이 광주라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태촌에게 책을 선물하고 친근하게 대했다. 출소 후 김태촌은 박 검사를 찾아갔고, 두 사람은 친형제만큼 막역한 사이가 됐다.
박 검사를 만난 후 김태촌의 인생은 승승장구하며 만사형통으로 풀리는 듯했다. 박 검사는 단순한 검사가 아니라 5공 실세, 정치인, 법조인, 사업가까지 막강한 정치-사회적 인맥을 지닌 인물이었다. 덕분에 김태촌도 어마어마한 인맥을 얻게 됐다. 김태촌은 조폭 두목이 아니라 어엿한 사업가로 신분을 포장했다. 김태촌은 박 검사의 영향력을 통하여 '든든한 빽'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하지만 박 검사가 김태촌을 찾아와 인연을 맺은 데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오랫동안 김태촌을 돕기만 하던 박 검사는, 어느날 김태촌을 불러 은밀한 부탁 하나를 전했다.
박 검사는 초등학교 동창인 황 사장이 운영하는 인천의 한 호텔에 거액을 투자했지만, 호텔 적자로 이자는 커녕 원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본인이 검사 신분이라 직접 나서거나 경찰에 수사를 요구하지도 못하며 몇 년째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며 김태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김태촌은 제안을 승낙하고 황 사장을 찾아가 협박하여 돈을 갚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황 사장이 오히려 검찰에 진정서를 넣어 '박 검사가 깡패들을 이용해 자신을 협박했다'고 폭로하며 상황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에 분노한 박 검사는 김태촌에게 황 사장을 살해해줄 것을 요구한다.
김태촌의 수기에 따르면 당시 박 검사는 "어떤 조건도 다 들어주겠으니 황 사장만 살해해 달라. 그리고 증거로 머리카락만 몇 개만 뽑아 오라고 했다. 황 사장 머리카락이라도 씹어서 삼켜버리면 분이 풀리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김태촌은 고민에 빠졌다. 황 사장이 이미 깡패한테 협박 당했다고 진정서를 넣은 상황에서 살해까지 당하면, 본인이 유력한 용의지가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 김태촌이 망설이자, 박 검사는 화를 내며 "너도 날 배신하겠다는 거냐. 너 다시 내가 잡아 넣을 수도 있다"고 협박까지 하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김태촌은 결국 박 검사의 명령을 따르기로 하고, 몇 가지 조건을 달았다. 사표를 쓰지말고 현직 검사로 남아 사건을 수습해줄 것, 부하들을 자수 시키거나 혹은 본인이 구속된다면 석방되는 그날까지 생활비를 지원해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속을 지킨다는 증표로 혈서를 쓰는 것이었다. 혈서에 적힌 글자는 바로 신의(信義). 믿음과 의리를 의미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 SBS |
1986년 7월 26일 새벽 4시. 황 사장은 자신의 호텔에서 잠을 자다가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 괴한들은 낫과 곡괭이로 황 사장을 공격했지만, 전직이 깡패였던 황 사장이 중상을 입으면서도 끝까지 저항하면서 괴한들은 끝내 살해를 포기하고 도주했다. 황 사장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평생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충격을 받은 황 사장은 차마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김태촌과 박 검사는 황 사장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복수와 완전범죄에 성공했다고 믿고 희희낙락했다. 열흘 뒤 김태촌이 경찰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박 검사가 나타나 상황을 무마시키고 도주를 돕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태촌과 박 검사는 완벽한 한 팀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용히 묻힐 뻔했던 황 사장 피습 사건은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된다. 바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조폭들의 집단 살인사건,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황 사장 피습 사건이 있고 불과 20일 후, 서울의 한 룸살롱에서 서울 목포파 VS 맘보파가 우연한 시비로 싸움이 붙었다. 이로 인하여 당시 맘보파 조직원 7명 중 무려 4명이 참혹하게 사망했다. 이전에도 조폭간에 싸움은 있었지만, 이만큼 잔혹한 살인사건은 처음이었기에 나라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맘보파는 바로 김태촌이 이끄는 서방파의 하부 조직 중 하나였다. 맘보파의 배후로 김태촌의 이름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이 뉴스를 병원에서 본 황 사장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피습사건을 뒤늦게 폭로했다. 한 달간 묻혀있던 사건이 언론에 대서특필되기 시작하면서 김태촌에 이어 박 검사까지 수사선상에 오르게 된다.
경찰은 김태촌에게 수배령을 내리고 현상금까지 걸었지만 행적이 묘연했다. 김태촌은 제주도에 은신해있었고 위치가 심지어 파출소 옆집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박 검사는 검찰 측의 방해로 이렇다 할 수사조차 하지 못했다. 검찰은 혐의를 부인하는 박 검사를 딱 한 번 불러 반나절 동안 조사했을 뿐. 제대로 된 수사의지를 보이지 않으며 제 식구 감싸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얼마 후 상황은 다시 반전된다. 김태촌이 든든한 빽이라고 평생 믿고 의지했던 박 검사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며 돌연 사표를 제출한 것. 언론에서 황 사장 피습 사건에 대한 보도가 계속 되면서 버티기 힘들어지자 혼자 살기 위하여 김태촌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신문보도로 사실을 알게 된 김태촌은 박 검사를 만나기 위하여 제주도에서 몰래 배를 타고 서울로 오다가 경찰에 검거됐다.
경찰은 김태촌에게 박 검사와의 관계를 추궁했다. 김태촌은 처음에는 황 사장과 동업을 하다가 갈등이 생겨서 벌어진 일이라며 박 검사와는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결국 김태촌은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징역 5년, 보호감호 7년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2년 후 김태촌은 놀랍게도 옥중에서 폐암 선고를 받고 형집행정지로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사람들은 박 검사에게 배신 당하고 화병을 얻은 것이라고 평가하며 '권력에 빌붙은 조폭의 비참한 말로'라고 조롱했다.
김태촌은 대수술을 받았지만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 평생 반성하는 마음으로 착하게 살겠다고 선언하며 종교에 귀의했다. 한동한 김태촌은 봉사활동과 기부를 하는 모습을 보이며 달라진 삶을 사는 듯했다.
그런데 1년 뒤, 노태우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10.13 특별선언)'을 선포하여 김태촌의 본색이 다시 드러난다. 검거된 조폭 명단에는 김태촌의 이름도 있었다. 종교에 귀의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국내 유명 호텔들의 도박장 운영권을 강탈하고 다닌 사실이 적발됐다. 경찰은 그의 재산을 20억 원 이상으로 추정했는데, 폐암 수술을 받고 불과 1년 4개월 만에 이 엄청난 재산을 모았던 것이다.
김태촌은 황 사장 사건으로 받은 5년에, 추가로 10년을 더해서, 무려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사건을 혼자 뒤집어 쓰며 재기를 노렸던 김태촌이지만 돌아온 건 3배로 늘어난 형기 뿐이었다.
'검사 사주' 뒤늦게 주장한 김태촌
세월이 흘러 2004년, 어느덧 54세가 된 김태촌의 이름이 다시 한번 뉴스에 등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태촌은 18년 전 황 사장 피습사건이 '박 검사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고 뒤늦게 폭로에 나섰다. 김태촌의 폭로를 최초 보도한 정희성 < 시사IN > 기자는, 당시 현직 검찰간부가 살인청부를 의뢰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김태촌은 정 기자에게 무려 6개월 동안이나 편지를 보냈고 이를 모아놓은 것이, 바로 '김태촌 수기'였다.
김태촌은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걸까? 그는 "죽기 전에 풀고 싶은 한 많은 사연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18년간 침묵했다는 것 자체가 이제 와서 증거 인멸할 것도 없고. 나만이 갖고 있는 한라는 게 있지 않나. 그 한을 풀어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진실을 밝히자. 이게 내 뜻이었다"고 고백했다. 2005년 김태촌이 직접 밝힌 인터뷰다.
박 검사는 검찰을 떠나 사무실을 개업해 변호사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 검사는 황당무계한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박 검사는 김태촌이 보호감호를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서 죄를 떠넘기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보호감호제도(현재는 폐지)는 재범 가능성이 높은 재소자들을 감호소에 머물게 하는 제도로, 김태촌은 당시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또한 박 검사는 김태촌이 살인청부를 폭로하기 몇 년 전 병원으로 찾아와 2000만 원의 돈까지 전해준 것으로 드러났다. 김태촌 측은 입막음을 위하여 준 돈이라고 주장했고, 박 검사는 김태촌이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고 반박했다.
결과적으로 18년 만의 진실공방은 승자없는 진흙탕싸움으로 끝났다. 박 검사의 바람과 달리 김태촌은 모든 진실을 폭로해버렸고, 김태촌은 보호감호 재심 청구가 기각됐다.
또 한 가지 미스터리로 남은 것은 두 사람이 함께 썼다던 '혈서'의 존재였다. 박 검사는 혈서를 쓴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김태촌은 끝까지 혈서를 공개하지 못했다. 만일 존재했다면 황 사장 사건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혈서에 썼다던 '신의'라는 단어는 과연 김태촌과 박 검사 사이에 정말 존재하기는 했을까?
한편으로 김태촌의 주먹을 이용하려고 했던 이들은 박 검사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김태촌이 공개한 비망록에 따르면, 국회의원, 경찰, 군인, 의사, 교수, 연예인 심지어 안기부(현 국정원) 관계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당시 김태촌은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에 그의 힘이 안 닿는 곳이 없었다. 비망록엔 김태촌에게 힘을 쥐어준 사람들의 이름, 전화번호, 심지어 오고간 돈의 액수까지 세세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언급된 관계자들은 모두 거짓말이고 김태촌에게 10원 한 장 받은 게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거물급 인사들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도 못했다. 그저 비망록에서 하단 구석에 적힌 몇몇 공직자들만 옷을 벗는 데 그쳤다.
2013년 1월 5일. 김태촌은 결국 폐렴과 심장질환으로 인하여 63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조폭 두목이었지만, 정작 그가 자유의 몸이었던 시간은 고작 30년 남짓에 불과했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에 대한 과거와 현재, 이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너희는 이렇게 되지 마라'는 뜻이다"라며 "조직폭력에서 의리 같은 건 소설에서나 나오는 거지. 내 일생을 청소년들에게 보여주면서 '나 같이 되지 말아라' 영화나 소설에서 미화시킨 걸 믿지 마라. 정말 불행하고 가장 나쁘게 되는 것이 조직폭력이다"라고 당부했다.
김태촌은 말년에 청소년을 선도하는 강연을 다니며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조폭이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그저 '권력의 하수인'일 뿐이라는 마지막 고백만큼은, 어쩌면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극중에서의 악행이라고 해도 죄책감을 느끼게 되면 연기를 하기 어렵다고 한다. 김태촌같은 조직폭력배도, 그의 주먹을 이용하려고 했던 부패한 검사나 상류층도, 마치 배우가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것처럼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완벽한 '자기합리화'가 되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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