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대신 야설을 쓰기 시작한 16살 소녀의 이야기
[김형욱 기자]
▲ 영화 <소녀작가 입문기> 포스터. |
ⓒ 미디어톡 |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 숙현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글을 써서 밥 벌어먹고 있으니 작가인데, 야설을 쓴다. 요즘 연재하는 건 '형수의 일기'인데 인기가 꽤 좋은 모양이다. 계약금 천만 원을 받고 책 출간 계약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뻐하던 것도 잠시,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 의사가 말하길 왜 깨어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며, 정신이 나간 것 같단다.
숙현의 16살짜리 딸 지아는 발레리나를 꿈꾸는 소녀다. 하지만 고민이 많다. 발레를 배우는 데 돈이 오죽 많이 들어가지 않나. 집안 사정이 뻔하니 언제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불안하다. 같이 발레를 배우는 친구는 집안에 돈이 넘쳐난다며 염장을 지르고 말이다. 그러던 중 엄마가 쓰러지며 어느 날 갑자기 집에 혼자 남는다. 누군가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가 야설을 연재하는 사이트의 편집장이었다. 매주 수요일 자정이 마감인 거 아느냐고, 잊지 말고 꼭 올리라고 말이다. 지아는 그러려니 하다가 수요일 마감 시간이 닥치자 글을 써보기로 한다. 야설을 말이다. 옆집 412호에 이사온 분이 가져다준 떡을 먹고 있던 지아는 '떡'을 소재로 상상력 넘치는 야설을 써 내려간다. 의외로 큰 반응을 얻는 지아의 야설. 하지만 그녀는 학교 안팎에서 이런저런 송사에 휘말리는데…
16살 소녀의 코믹 성장기
'의외의 발견'이라는 말이 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우연히 봤다가 상당한 재미를 느끼는 쾌감 혹은 희열은 은근히 강력하다. 영화로 한정하면 돈을 많이 들여 만든 큰 영화 또는 각 잡고 만든 독립 영화가 아닌 애매한 영화를 볼 때 종종 의외의 발견을 한다. 2020년 <공수도>가 그랬고 2021년 <액션히어로>가 그랬으며 2022년 <봄날>이 그랬다.
<봄날>을 제외하곤 공통적으로 청춘들의 코믹 성장기다. <소녀작가 입문기>도 그렇다. 쓰러진 엄마를 대신해 컴퓨터 앞에 앉아 19금 야설을 써 내려가는 16살 소녀. 선정적이기 이를 데 없는 소재이지만, 생각만 해도 웃음이 삐져 나올 것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그녀는 발레리나를 꿈꾸며 중학생 시절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소녀다.
비록 16살에 불과하지만 알 만큼 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막상 뭘 해 본 게 없다. 경험다운 경험이 없다시피 한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야설을 쓴다니, 직접적인 얘기는 할 수 없고 상상력에 기반한 이야기나 평소 흠모하고 있는 윤리 선생님을 떠올리며 분위기를 가져오는 식으로 쓸 수밖에 없다. 신선한 전개와 분위기에 독자들이 열광한다지만 지아는 혼란스러울 뿐이다.
▲ 영화 <소녀작가 입문기> 스틸컷. |
ⓒ 미디어톡 |
별 생각 없이 야설을 쓰기 시작한 지아는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나며 얽힌다. 엄마의 야설 마감을 독촉하는 남 사장, 엄마와 친했다고 하는 유명 작가, 평소 흠모해마지 않는 윤리 선생님, 괜히 시비 붙이러 와서는 친해진 언니, 돈 많다고 유세 떠는 발레리나 동료, 옆집 412호에 이사 왔다는 새댁, 지아가 올린 야설에 환장하는 독자들, 지아가 올린 야설에 욕설을 가하는 412호 새댁 남편 등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16살이라는 나이는 참으로 애매하다. 청소년의 나이인데 아직 고등학생이 아니니까 한없이 어리게 느껴진다. 어린이에 가까운 것이다. 반면 겉으로 보기엔 다 큰 것 같다. 한 인간으로서 충분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또 제 몫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혼란기 또는 과도기 때 사춘기가 찾아온다.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어느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지아도 혼란스럽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철이 없다. 발레리나를 꿈꾸지만 집안 사정이 뻔하다. 학교 생활은 뭔가 수준이 맞지 않는 것 같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전언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말이 통하는 것 같은 선생님을 흠모하지만 너무 먼 당신이다. 그런 와중에 엄마가 쓰러지니 졸지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다.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바뀌는 건 없고 모든 게 제자리걸음인 듯하다.
소녀와 얽히고설키는 사람들
성장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계단식이랄까.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는 듯 평평하게 오래 지속되다가 단번에 훌쩍 커 버리는 것, 뛰어넘어 버리는 것.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오래 지속되는 평평함만 인지하니 그 시간이 너무 힘든 한편 정작 성장하는 순간은 인지하지 못하니 변하는 게 없다는 인식만 계속되어 힘들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주위 사람들이다. 잘하고 있다고, 많이 성장했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
지아에게도 다행히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녀의 지금을 인정하고 그녀의 미래를 응원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녀를 힘들게 하는 이들도 있다. 의외로 엄마도 힘들게 하고 윤리 선생님도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그 모든 이가 지아의 성장에 있어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받지 않는 선에서 경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말이다.
영화는 작디 작고 만듦새도 허술한 편이지만 허성태, 이준혁, 김영민, 이동하 등 꽤 굵직한 이름들이 조연에 이름을 올리고 얼굴을 비췄다. 하나같이 어설픈 캐릭터에 잘 녹아든 듯한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사랑스럽다고까진 못하겠으나 그 비스무리한 느낌 덕분에 영화의 단점들이 많이 가려졌다. 좌충우돌 고군분투 청춘의 성장기는 언제나 환영이다. 그들은 응원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성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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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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