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젊은이들 한꺼번에 사형... 이제야 '무죄'가 되다
[제주다크투어]
▲ 제주지방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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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합동수행단(단장 강종헌) 변진환 검사는 최종변론의 중에 오늘 재판의 피고인들이 왜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지에 대해 설명하며, 그간 합동수행단에 참여하여 재심을 진행해온 소감을 짧게 밝혔다.
"오늘 피고인 30명 중에 1명을 제외하고는 1948년과 1949년에 군법회의를 거쳐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당시 하루에 100여 명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 군법회의는 1949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에는 모든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런데 7월 1일에는 모든 피고인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옛말에 군대를 가면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때도 재판을 어느 날에 받느냐에 따라 형량이 결정되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증명하고 확인하는 절차가 없었다.
중산간지역의 사람들을 연행하여 재판을 했고, 쭉 세워 놓고 동일한 형을 선고했다. 어떤 사람은 재판을 받은 기억도 없다.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을 말해줘서 알게 되는 경우도 많았고, 재판장의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었다. 이 군법회의는 죄를 처벌하는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군인들이 잡아온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군법회의로 처벌을 받았음을 말씀드리고 싶다.
제가 제주 출신인데, 4·3사건을 잘 몰랐다. 제주 출신이니까 잘 알 것이라고 여겨 합동수행단에 배정된 것 같은데, 4·3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부모님한테 들은 것 뿐이었다. 검사직을 하면서 재심을 해본 적이 없다. 재심 엄무를 하기 전까지 재심절차도 잘 몰랐다. 검사를 하면서 유죄 선고를 받으려고 재판을 해봤지 무죄를 받기 위해 재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재심을 하면서 4·3에 대해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비극적인 역사에서 그나마 재심을 통해 무고함과 무죄를 밝힐 수 있어서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있다." (검사의 발언을 받아 적은 것으로 실제 발언내용과 일부 다를 수 있음.)
박현민 변호인은 "피고인들은 4·3의 와중에 젊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에 산다는 이유로, 아무런 이유 없이 군·경에 의해 연행되었고,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유죄를 입증할만한 증거는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한다는 말이 있듯이 30명 전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려달라"고 최종변론을 마쳤다.
이후 강 부장판사는 법정에 참석한 망인이 된 피고인들의 유족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제공했다.
망 부은진은 용강리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9년 5월 사망하였다. 그의 유족은 마이크를 들고 "이 자리가 너무 이렇게 큰 자리인줄 모르고 왔다. 모친이 8세에 아버지가 4·3으로 인해 돌아가신 것을 얘기만 들었지, 오늘 법정이 와보니 너무 많은 제주인들이 피해 당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할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형무소로 끌려가신 줄 알았는데, 오늘로 무죄를 받게 되어 너무 기쁘다"라고 말했다.
정원종은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옥문이 풀린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딸 정아무개씨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모른다. 그때 당시에 내 호적을 큰아버지 밑으로 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한 것이 한이다. 이번 기회에 아버지의 딸이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원이 없겠다"라는 바람을 밝혔다.
망 진재남은 안덕면 상천리 출신으로 국방경비법 위반을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고, 1949년 12월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97~1998년 제주공항 활주로 주변 유해발굴 당시 망인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그의 아들 진아무개씨는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다. 그런데 커가면서 연좌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의 모든 공직은 연좌제로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가서 60년 만에 내려왔다. 서울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많이 원망스럽다.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다면, 억울하고 분하지만 세상 원망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겠다"라고 증언했다.
망 김중건은 조천 신흥리 출신으로 4·3 당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유족 김아무개씨는 "할아버지가 무죄를 받게 되어 너무 기쁘다. 우리집에서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간 백중날 제사를 해서 수장이 되어 유골을 못 찾고 있다고 알았고, 가족묘에 묫자리에 비석만 세워져 있다. 오늘 할아버지가 수장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무죄 판결을 받게 되어 기쁜 날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망 강영훈은 서귀편 서홍리 출신으로 4·3때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9년 9월 사망했다. 그의 조카손녀 강아무개씨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밖에서 일을 하다가 끌려가 인천형무소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안다. 자손이 없어 조카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돌아가셨을 때 심정이 어땠을지, 그때는 형편이 어려워 시신 수습도 못했다고 하더라. 이번 직권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내려주시면 억울한 한이 풀리고, 유족들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 같다"라고 무죄 선고를 요청했다.
망 김복림은 조천 신흥리 출신으로 70여 년 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아들 김아무개씨는 "내가 3살 때 아버지가 끌려갔다. 어린 동생도 희생되었다. 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모르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외할머니는 '너의 아버지는 죄도 없는데, 젊어서 끌려갔다'고 말했다"라고 증언하다 목이 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김아무개씨의 아내는 "21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보니 학교도 제대로 못다녔다. 4.3 때 생후 100일이던 남편의 동생을 시어머니가 업고 가다가 함께 죽었다. 남편의 동생만 살아있어도 이렇게까지 외롭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오늘 시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게 되었다. 이번 기회로 진상이 규명되어 우리 4남매 자녀들이 좀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라며 발언을 마쳤다.
망 이윤성은 제주읍 일도리 출신으로 1948년 내란죄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고, 1949년 2월 화북리 부근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다. 재판에 참석한 그녀의 딸 이아무개씨는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어머니도 22세에 혼자되어, 남편을 가슴에 묻고 나랑 살다 돌아가셨다"라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 아버지가 죄인이 아니랍니다. 하늘에서 아버님 만나셔서 행복하게 사셔요"라며 발언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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