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맺어준 형제, 아버지가 남긴 폐가를 고치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여덟 개의 산>

[김상목 기자]

반드시 큰 스크린으로 볼 것!

<여덟 개의 산> 영화를 보고 나서 곧바로 뭔가에 홀린 것처럼 책장 어딘가에 감춰져 보이지 않던 원작소설을 찾아냈다. 구입한 지 한참 되었지만 제대로 읽지 않고 구석에 박아둔 책인데, 영화를 본 직후라 그런지 마치 작품 속 배경인 해발 수천 미터 만년설에서 스키 타고 내려오듯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장식용으로 한참 머물렀던 책이 이런 내용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활자로 인쇄된 책과 그것을 시각화한 영화의 질감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어떤 이는 책이 제공하는 여백의 가변성과 해석의 자유도 때문에 상상 속의 형상화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반면, 다른 이는 시각화된 이미지의 재현도 혹은 거대한 스케일을 목도하는 이가 느끼는 숭고함에 압도되곤 한다. 물론 정답은 없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은 두말할 것 없는 현대 판타지 영화화의 레퍼런스이지만, 톨킨의 원작 팬들 중 상당수는 이 시리즈가 톨킨의 가운데 땅 상상도를 획일화된 이미지로 고착화시켜버렸다고 불만을 종종 토로하곤 하듯이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여덟 개의 산>의 영화화 버전을 먼저 본 게 조금 더 좋았던 것 같다. 다행히 책과 영화의 시차도 그리 멀지 않다(책은 2016년에 출간되었고, 영화는 6년 후인 2022년에 공개되었다. 이 정도면 아예 출판 준비 단계부터 시나리오화가 병행되는 수준 외에는 거의 간격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영화는 원작 속에서 알파이자 오메가라 해도 좋을,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악지대의 웅혼함을 고스란히 시각화해내는데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산이라는 건 역시 직접 가서 봐야 그 압도적인 위엄을 체감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점에서 소설의 문장력 또한 평범한 수준과는 거리가 까마득히 멀지만 스크린에서 제공하는 숭고미에 비해선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영화를 처음 보는 체험을 극장 스크린이 아니라 온라인 스크리너로 접한 게 너무 속상할 지경이긴 하다. 왜 나는 영화제에서 <여덟 개의 산>을 볼 기회를 고작 게으름 때문에 놓쳤단 말인가. 이 영화를 보려면 꼭 가급적 큰 스크린으로 몰입 정도를 유지해 가며 보시길 권한다.

영화는 소설 원작처럼 아예 챕터를 화면에 표시하진 않지만 큰 흐름은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소설은 1부 어린 시절의 산 - 2부 화해의 집 - 3부 친구의 겨울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 역시 이 구조를 큰 변형 없이 따르는 편이다. 물론 2시간 30분에 가까운 묵직한 분량의 중량급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원작을 토씨 하나 그대로 옮길 순 없는 노릇이다. 그에 따라 영화는 소설의 배경설명이나 진행에 크게 무리가 없는 곁가지 에피소드들을 축약했지만 소설과 대조해보면 거의 극화 형식에 가깝게 옮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소설을, 소설을 읽은 이라면 영화를 가능한 연동해 관람하는 게 감상을 극대화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만큼 둘이 서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다.

소년, 소년을 만나다
 

▲ "여덟 개의 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북부 상공업 도시에서 중산층으로 큰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 11살 소년 피에트로는 여름 휴가철 해마다 알프스 산악지대에 가족과 함께 피서를 간다. 아버지는 대공장 엔지니어(소설에선 화학자)이지만 등산을 즐긴다. 아버지는 늘 피에트로가 함께 등산길에 동행하길 바란다. 어머니는 과묵하고 뒤돌아보지 않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다. 피에트로는 이제는 쇠락한 드라나 마을에서 유일한 또래 소년 브루노를 만난다. 둘은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아버지는 브루노도 함께 데리고 산맥과 빙하를 탐험하는 여정에 종종 나선다.

어린 소년들은 산악지대에서 둘만의 모험을 통해 말이 필요 없는 우정을 형성한다. 여기에 피에트로의 부모도 일조한다. 아버지 조반니는 계절노동자로 타지를 떠도는 브루노의 아버지 대신 소년을 아끼며 학업을 마치도록 권유하거나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한다. 하지만 브루노의 아버지는 도시로 아들을 데려가 학비를 지원하겠다는 피에트로 부모의 요청을 거부한 채 아들을 데리고 떠나버린다. 이후로 오랫동안 두 소년은 만나지 못한다. 몇 년 후 반항적인 청년이 된 피에트로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벽돌공이 된 브루노는 우연히 바에서 재회하지만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변한 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그런 둘을 재회하게 만든 건 피에트로의 아버지 조반니의 이른 죽음이었다. 그는 죽으면서 오랫동안 자신과 대립하며 대화를 중단한 아들에게 자신이 몇 년 전 구입한 드라나 마을 산기슭의 폐가를 유산으로 남겼던 것이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간 그곳에서 피에트로는 브루노와 재회한다. 피에트로가 부친이 바라던 학업 대신 다큐멘터리 영화를 하겠다며 오랫동안 관계를 단절한 동안 브루노가 그의 아버지 산행에 자주  동행해 왔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피에트로는 묘한 감정에 빠져든다. 정작 친아들인 그는 아버지의 임종 때까지 끝내 화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모르는 면모를 옛 친구 브루노에게는 보여줬던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마치 아버지 조반니는 어쩌면 두 명의 아들을 둔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기분이다.

'수미산'을 지키는 이와 여덟 개의 산을 유랑하는 이
 

▲ "여덟 개의 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브루노는 혼란해하는 피에트로에게 더욱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피에트로의 부친이 생전에 이 폐가를 수리하는 것을 자신에게 의뢰했다는 것이다. 해발 2천 미터의 고산지대라 자동차는 다닐 수 없는 험지다. 비숙련 조수가 있다면 넉 달이면 대충 수리를 마칠 수 있겠다며 브루노는 운을 띄운다. 그렇게 피에트로는 브루노의 조수가 되어 함께 부친의 유산을 복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늘 여름 몇 주만 머물던 드라나의 산간지대에서 봄부터 여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어릴 적엔 매년 들렀다지만 피에트로로서는 처음 보는 산의 풍경인 셈이다. 브루노는 산사람답게 작업현장에서 천막생활을 하고 피에트로는 정시 출퇴근을 한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9평 오두막이 완성된다.

피에트로는 어느덧 형제나 다름없어진 브루노에게 이 집은 둘의 공동소유와 같다고 선포하고, 이후 몇 년간 여름에 찾아와 도시생활에 지친 심신을 충전한다. 브루노는 생계를 위해 이것저것 일하면서도 고향 마을에서 목장을 꾸릴 준비에 여념이 없다. 경사도 생긴다. 산지생활을 그리워하던 피에트로의 지인과 맺어져 가족을 이룬다. 그렇게 드라나 마을의 지박령처럼 산을 떠나지 않는 브루노에 비해 피에트로는 여전히 유랑을 거듭한다. 그는 거창하게 생태공동체를 거론하거나 하진 않지만 그와 비슷한 삶을 희구하며 네팔에 닿는다. 그는 그곳에서 브루노와 함께 머물던 산과 닮은 풍경을 발견하고 자주 머물게 된다.

영화와 소설의 제목이 된 '여덟 개의 산'은 그가 히말라야 트래킹 중 만난 네팔 고산부족 노인에게서 듣게 된 이야기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파생된 수미산과 그 주변을 형성하는 산과 바다의 이야기는 브루노에게 꼭 전해주고 싶어질 만큼 피에트로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진다. 그의 독백과 함께 훗날 이를 듣게 된 친구는 역시 무척 흥미로워한다. 네팔의 조장 풍습에 대해 사람들은 혐오스러워하지만 브루노는 산에 온전히 함께 한다는 발상에 매료된다.

그렇게 세상을 두루 떠돌다가도 오두막으로 돌아가 안식을 찾는 피에트로와 고향에서 목장 일을 하며 가족과 함께 소박한 삶을 살던 브루노의 시간은 이탈리아를 휩쓴 경제위기로 위험에 처한다. 착유기를 쓰지 않고 전통 방식으로 고품질 수제 치즈를 만들고 물레방아와 연결된 소수력 발전기로 전력을 자급자족하며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아왔지만 목장을 인수하기 위한 은행대출은 내내 브루노의 발목을 잡아채는 꼴이다. 그 위기의 끝에서 세상의 중심인 가장 높은 산에 오르는 이와 세상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산과 바다를 횡단하는 이의 운명은 엇갈리게 된다. 피에트로는 오두막에 은둔한 브루노를 돌보기 위해 처음으로 드라나의 겨울에 도전한다.

책과 영화가 수미상관으로 교차하는 극한의 감상법
 

▲ "여덟 개의 산"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철저하게 도시인으로 살아왔다. 산을 타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잘 타지도 못했다. 요즘은 아예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소싯적에 산 몇 곳 정도는 도전해볼 걸 하는 회한이 괜하게 떠오르고 만다. 그만큼 이 영화 속 이탈리아 알프스의 풍광과 인간이 함부로 측량할 수 없는, 경외감을 갖고 대해야 할 존재로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때로는 웅혼하고 때로는 냉혹한 산의 매력이 영화 전체에서 뿜어져 나온다. 네팔 노인의 이야기가 마치 세상을 구성하는 비밀의 열쇠 말처럼 들릴 지경이다.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원작자인 파올로 코녜티와 그의 지인들의 삶과 체험을 반영한다. 재현 수준을 높이기 위해 실제로 해발 2천 미터 고지대에 둘이 기거하는 오두막을 설치하고 사계절을 담아내기 위해 애쓴 흔적이 묻어난다.

그렇게 공들여 만든 세트라면 그 무대를 더 돋보이게 하려고 시네마스코프와 와이드스크린에 대한 유혹을 충분히 느낄법한데도 제작진은 오히려 역발상을 취한다. 화면을 좌우로 잡아 늘리는 대신에 오히려 더 죄여내는 식이다. 손쉬운 유혹을 피해 결국 산을 무대로 한 두 주인공의 관계에 집중하려는 1.37:1의 화면비가 압도적 몰입을 선사한다.

<마틴 에덴>에서 압도적인 표정과 눈빛으로 자신을 각인시켰던 루카 마리넬리가 맡은 피에트로와, 그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브루노 역 알레산드로 보르기의 화학적 결합, 여기에 나이가 들어서야 뒤늦게 알아채곤 하는 가족 간의 농밀한 감정 선이 장대한 풍경과 혼연일체를 이룬다. 그저 이탈리아 알프스와 네팔 히말라야가 교차되고, 대도시와 산간지대가 횡단할 뿐인데 그 안에 세상의 온갖 요소가 충돌하고 순수함과 세속이 엇갈린다. 반드시 화면비와 음향 제대로 구현된 극장 스크린으로 체험하기를 권하는 영화다. 그리고 후일담 확인 겸 책을 통해 영화의 감상을 각자 응축해본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다.

<작품정보>

여덟 개의 산 The Eight Mountains
2022｜이탈리아｜드라마
2023.09.20. 개봉｜147분｜12세 관람가
감독 펠릭스 반 그뢰닝엔, 샤를로트 반더미르히
주연 루카 마리넬리(피에트로 역), 알레산드로 보르기(브루노 역)
출연 필리포 티미(조반니 역), 엘레나 리에티(피에트로 모 역),
엘리자베타 마즐로(라라 역), 수락시야 판타(아스미 역)
원작 파올로 코녜티 「여덟 개의 산」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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