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탐정이 귀신 보는 심령술사와 만난다면

김성호 2023. 9. 1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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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40]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김성호 기자]

제가 좋아하는 무엇을 남에게 권하고픈 건 무리동물인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이다. 맛있는 식당을 발견하거나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멋진 거리를 걷거나 재밌는 영화를 보았을 때 우리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다.

제가 만난 매력적인 사람을 친구에게 소개하고 싶다거나 다녀온 여행지를 타인에게 권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연유라고 하겠다.

당신이 만약 영화감독이라면, 그것도 문학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영화감독이라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틀림없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을 영화로 만들고자 시도할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영화가 그렇게 태어났고, 오늘 이야기할 영화 또한 그렇게 만들어졌다.
 
▲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국문학 애호가 케네스 브래너 신작

케네스 브래너는 자타가 인정하는 문학 애호가다. 연극에 몰두하던 시절부터 영문학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 그는 1989년 셰익스피어 원작의 <헨리 5세>를 영화화해 평단을 매료시킨다. 엄청난 열정과 파격적 아이디어가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걸작으로 그는 단박에 영국 영화계의 미래를 이끌 기대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여세를 몰아 <햄릿>을 영화화하기도 한 그는 연출과 연기를 넘나들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표출한다.

브래너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7년부터 또 다른 영국문학의 영화화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이다.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학가 중 한 명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연달아 영화로 제작했다. 그 처음은 거장 시드니 루멧이 1974년 앞서 만든 바 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다. 고립된 공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유능한 탐정이 풀어낸다는 정석적인 추리물로, 루멧은 소설과는 또 다른 장점을 가진 영화의 매력을 한껏 살려 고전을 새로이 명작으로 만들어냈다.

브래너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루멧의 것과 또 다른 매력이 있다는 호평과 함께 제작비의 6배가 넘는 수익을 이끌었다. 첫 작품의 무난한 성과로 프로젝트는 이어졌다. 2022년 갤 가돗, 아미 해머 등의 스타를 기용한 <나일강의 죽음>은 코로나19 확산이란 악조건 속에서도 손익분기를 넘겼다.
  
▲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일류 탐정이 심령술사와 만난다면

그로부터 세 번째 시리즈가 돛을 펴니 신작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이 되겠다. 오스카의 주인이 된 양자경이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한 이 작품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티의 소설 원작에 브래너가 직접 탐정인 에르퀼 포와로를 연기했다.

고단하고 위험한 탐정 일을 접고서 모처럼 평안한 시간을 보내는 포와로다. 제 사건을 풀어달라며 매일 같이 찾아오는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기는 하지만, 고용한 퇴역경찰이 불편하지 않도록 철저히 막아준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한 손님 하나가 포와로를 찾는다. 베스트셀러 추리소설 작가이자 오랜 지인이기도 한 아리아드네 올리버(티나 페이 분)다. 그녀가 포와로에게 새로운 사건 하나를 해결하자 제안한다.

그녀가 청탁한 사건은 베니스 어느 저택에서 벌어질 일이다. 죽은 영혼을 부를 수 있다는 심령술사 조이스 레이놀즈(양자경 분)가 1년 전 딸을 잃은 가수 로웨나 드레이크(켈리 라일리 분)의 청을 받아 영혼과 산 자를 만나도록 하는 교령술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포와로는 이 자리에 참석해 레이놀즈의 수작이 거짓임을 밝히려 한다.
 
▲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추리영화 전성시대... 포와로는 계속될까

포와로는 딸의 죽음이 알려진 것과 달리 살인임을 밝혀내고 교령술에 참석한 이들 중 하나가 범인이라고 지목한다. 베니스에 몰아닥친 풍랑은 저택 안에 든 이들을 고립시키고 사건의 해결은 언제나처럼 오로지 포와로에게 달린다. 목격자는 없고 용의자는 유령뿐인 난감한 사건, 심령술사와 탐정, 퇴직 경찰과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또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영화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이번으로 3부작이 나온 에르퀼 포와로 시리즈를 비롯하여 추리영화가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 역대급 완성도를 보인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도 지난해 후속편이 개봉했고, 휴 그랜트가 3편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브래너의 포와로 시리즈도 성적에 따라 후속편이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한국에선 <조선명탐정>의 중단 이후 멈춰버린 게 아쉽지만 유능한 탐정을 내세워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물이 영화로써도 충분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소설과는 다른 특질을 가진 영화가 추리물의 맛과 멋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는지와 관련해선 꾸준한 의혹이 따라붙는다. 존슨이 <나이브스 아웃>을 통해 소설이 넘보지 못할 추리영화의 영역을 확인하긴 했으나, 그를 전후한 많은 작품에서 영화는 소설보다 추리를 다루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한계점을 노정하고 있는 탓이다. 영화로 전환하기 용이하다는 평가를 받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성공했으나 후속작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은 이 같은 우려에 힘을 실었다.
 
▲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공포의 문법으로 승부하는 추리물이라니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그래서 더욱 중요한 영화일 밖에 없다. 고립된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뛰어난 탐정의 활약으로 해결한다는 구성에 심령술이라는 특별한 요소를 더한 것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기대하는 이가 많다. 양자경이 연기한 심령술사와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얼마나 시각과 청각적 효과를 발휘하는지가 영화의 성패와 직결될 밖에 없다.

브래너 또한 이를 잘 알아서 영화는 다른 어느 작품보다 시청각적 효과에 공을 들인 듯 보인다. 유령과 교감하는 순간은 극중 포와로에게 거의 초현실적 존재를 믿게 할 만큼 충격적이며, 관객에게도 얼마간의 충격을 미친다. 그 충격이 관객을 저택 안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며 긴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기대한 승부수가 아닌가.

불행히도 내게는 그 충격이 온전하진 못했다. 기습적으로 닥쳐오는 커다란 사운드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연출은 이미 수많은 공포영화가 상습적으로 기대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설만큼 치밀하고 차분하게 깔아둘 수 없는 단서는 영화를 허술하게 느끼도록 한다. 이야기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끌려가고 마침내 포와로 개인의 능력으로 술술술 풀려나가는 결말을 맞는다. 반세기도 훨씬 전에 쓰인 원작 속 장치들이 오늘의 관객에겐 낡게 느껴진다는 점도 아쉽다. 아쉽게도 브래너가 애정하는 명작 추리소설은 이 시대에는 더는 새롭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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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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