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탐정이 귀신 보는 심령술사와 만난다면
[김성호 기자]
제가 좋아하는 무엇을 남에게 권하고픈 건 무리동물인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이다. 맛있는 식당을 발견하거나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멋진 거리를 걷거나 재밌는 영화를 보았을 때 우리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다.
제가 만난 매력적인 사람을 친구에게 소개하고 싶다거나 다녀온 여행지를 타인에게 권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연유라고 하겠다.
▲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포스터 |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영국문학 애호가 케네스 브래너 신작
케네스 브래너는 자타가 인정하는 문학 애호가다. 연극에 몰두하던 시절부터 영문학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 그는 1989년 셰익스피어 원작의 <헨리 5세>를 영화화해 평단을 매료시킨다. 엄청난 열정과 파격적 아이디어가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걸작으로 그는 단박에 영국 영화계의 미래를 이끌 기대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여세를 몰아 <햄릿>을 영화화하기도 한 그는 연출과 연기를 넘나들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표출한다.
브래너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7년부터 또 다른 영국문학의 영화화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이다.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학가 중 한 명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연달아 영화로 제작했다. 그 처음은 거장 시드니 루멧이 1974년 앞서 만든 바 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다. 고립된 공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유능한 탐정이 풀어낸다는 정석적인 추리물로, 루멧은 소설과는 또 다른 장점을 가진 영화의 매력을 한껏 살려 고전을 새로이 명작으로 만들어냈다.
▲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스틸컷 |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일류 탐정이 심령술사와 만난다면
그로부터 세 번째 시리즈가 돛을 펴니 신작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이 되겠다. 오스카의 주인이 된 양자경이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한 이 작품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티의 소설 원작에 브래너가 직접 탐정인 에르퀼 포와로를 연기했다.
고단하고 위험한 탐정 일을 접고서 모처럼 평안한 시간을 보내는 포와로다. 제 사건을 풀어달라며 매일 같이 찾아오는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기는 하지만, 고용한 퇴역경찰이 불편하지 않도록 철저히 막아준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한 손님 하나가 포와로를 찾는다. 베스트셀러 추리소설 작가이자 오랜 지인이기도 한 아리아드네 올리버(티나 페이 분)다. 그녀가 포와로에게 새로운 사건 하나를 해결하자 제안한다.
▲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스틸컷 |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추리영화 전성시대... 포와로는 계속될까
포와로는 딸의 죽음이 알려진 것과 달리 살인임을 밝혀내고 교령술에 참석한 이들 중 하나가 범인이라고 지목한다. 베니스에 몰아닥친 풍랑은 저택 안에 든 이들을 고립시키고 사건의 해결은 언제나처럼 오로지 포와로에게 달린다. 목격자는 없고 용의자는 유령뿐인 난감한 사건, 심령술사와 탐정, 퇴직 경찰과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또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영화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이번으로 3부작이 나온 에르퀼 포와로 시리즈를 비롯하여 추리영화가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 역대급 완성도를 보인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도 지난해 후속편이 개봉했고, 휴 그랜트가 3편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브래너의 포와로 시리즈도 성적에 따라 후속편이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한국에선 <조선명탐정>의 중단 이후 멈춰버린 게 아쉽지만 유능한 탐정을 내세워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물이 영화로써도 충분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스틸컷 |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공포의 문법으로 승부하는 추리물이라니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그래서 더욱 중요한 영화일 밖에 없다. 고립된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뛰어난 탐정의 활약으로 해결한다는 구성에 심령술이라는 특별한 요소를 더한 것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기대하는 이가 많다. 양자경이 연기한 심령술사와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얼마나 시각과 청각적 효과를 발휘하는지가 영화의 성패와 직결될 밖에 없다.
브래너 또한 이를 잘 알아서 영화는 다른 어느 작품보다 시청각적 효과에 공을 들인 듯 보인다. 유령과 교감하는 순간은 극중 포와로에게 거의 초현실적 존재를 믿게 할 만큼 충격적이며, 관객에게도 얼마간의 충격을 미친다. 그 충격이 관객을 저택 안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며 긴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기대한 승부수가 아닌가.
불행히도 내게는 그 충격이 온전하진 못했다. 기습적으로 닥쳐오는 커다란 사운드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연출은 이미 수많은 공포영화가 상습적으로 기대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설만큼 치밀하고 차분하게 깔아둘 수 없는 단서는 영화를 허술하게 느끼도록 한다. 이야기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끌려가고 마침내 포와로 개인의 능력으로 술술술 풀려나가는 결말을 맞는다. 반세기도 훨씬 전에 쓰인 원작 속 장치들이 오늘의 관객에겐 낡게 느껴진다는 점도 아쉽다. 아쉽게도 브래너가 애정하는 명작 추리소설은 이 시대에는 더는 새롭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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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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