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장인 정신과 먹고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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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영화판도 예전이랑 달라졌어요. 장인 정신(匠人 精神) 같은 게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최근 술자리에서 한 영화업계 종사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이걸 '요즘 애들' 얘기라고 쉽게 치부한다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낭만이 생존의 위기를 압도하는 행복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영화 '드림'에서 '열정리스' PD라 불리는 주인공 소민(아이유)은 "열정은 오르는데 월급은 안 올라서 열정을 최저임금에 맞췄더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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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영화판도 예전이랑 달라졌어요. 장인 정신(匠人 精神) 같은 게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최근 술자리에서 한 영화업계 종사자가 이런 말을 했다. 과거엔 한 작품을 만들면서 각각의 영역을 담당하는 스태프들에게 공동의 목표의식이 있는 게 당연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현장에는 과거에도 지금도 ‘내가 책임지고 잘 만들어내야 하는 내 영화’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다만 영화의 완성과는 상관없이 계약기간이나 보수에 따라 이리저리 일터를 옮기면서 소위 스펙을 만드는 분위기가 이제는 있다는 뜻이다. 뛰어난 상상력과 타고난 감각에 ‘피 땀 눈물’을 더해 만들어낸 (심지어 감동까지 주는) 결과물들을 보며 늘 감탄해 온 사람으로서 슬픈 이야기였다. 동시에 어느 업계인들 다르랴 싶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해서 낭만적인 소리를 늘어놓는 건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일이었다. 마땅히 대꾸를 못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실은 현실이다.
봉사 아닌 경제활동이라면 같은 양의 노동을 통해 더 많은 소득을 얻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자연스럽다. 그간의 노력을 수없이 부정당하며 자존심을 짓밟힌 뒤에 바늘구멍을 통과했어도 이젠 드라마에서도 그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회사생활이 내 앞이라고 펼쳐질 리 없다. 가족 같은 회사라서 일하는 만큼 돈을 주지 않고, 열정 운운하며 자괴감만 건드리는 일터가 수두룩하다.
아침마다 꾸역꾸역 눈뜨며 힘들게 먹고 사는데 노동에 열정까지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이걸 ‘요즘 애들’ 얘기라고 쉽게 치부한다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낭만이 생존의 위기를 압도하는 행복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영화 ‘드림’에서 ‘열정리스’ PD라 불리는 주인공 소민(아이유)은 “열정은 오르는데 월급은 안 올라서 열정을 최저임금에 맞췄더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말한다. 현실은 이런 거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것, 요즘 열정은 그런 거다. 월급에 열정수당이 포함되던가. 덕업일치(덕질과 직업이 일치한다는 말. 즉,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를 이뤘다면 당신은 이 시대의 챔피언이다.
생계 유지에 몰두해 다른 것들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태도를 지금의 우리는 먹고사니즘이라고 부른다. 먹고사니즘은 무섭다. 당장 쓸 돈이 없으니 열정이니 연대니 사명감이니 하는 ‘낭만적인’ 것들은 후순위로 밀려난다. 선조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절묘한 속담을 지어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부동산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과 먹고사니즘이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배타성을,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가족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꿈보다는 안정적인 월급을 선택하고, 집을 빼앗긴 분노로 살인을 저지른다. 아파트를 지킬 주민 대표를 뽑을 때 전세인지 자가인지 묻는 촌극도 펼쳐진다.
엄태화 감독은 너무나 현실 같은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로 만들었다. 관객들의 현실은 우울감이 훨씬 센 블랙코미디다(여기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 따위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직장인들의 마음속에 직업 정신이든 장인 정신이든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곳곳에서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 존경받아 마땅하다.
고(故) 강수연 배우가 했다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은 멋진 말이긴 하지만 외모가 조인성급이더라도 현실적으로 돈 없는데 폼 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21세기는 우리에게 낭만적인 것들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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