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대만 사람들이 상처받았다"
“한국과 대만의 미래 관계에 대해 말해 달라.”
한국 언론에도 종종 기고하는 왕신셴 국립정치대 교수에게 누군가 던진 질문이다. 이달 초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미·중 전략경쟁과 양안 관계’란 관훈클럽 세미나에서였다. 그는 미래 아닌, 과거로 갔다. “1992년 한국과 대만이 단교했을 때 막 대학을 졸업한 상황이었다. 사실 한국이 명동에 있는 대사관을 중국에 넘겨줬을 때 많은 대만 사람이 상처받았다. 많은 이가 한국 관광 때 명동에서 중국 대사관을 보면서 ‘이게 원래 우리 것이었는데’ 했다고 한다.” 직전의 그는 상냥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처’라니. 그럴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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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년 전 단교 때 협의 소홀로 불신
이번엔 한·미·일 협력 강화 격변기
주변국과는 제대로 소통하고 있나
」
과거 대만은 혈맹 이상이었다. 처음엔 항일, 이후엔 반공을 함께했다. 단교 때 대만 정부의 항의문의 일부인데, 모두 사실이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후 대일본항쟁에서도 중화민국 또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해 왔다. 일본과의 전쟁 후 한국민의 안전 확보와 귀국을 도왔으며 생활비까지 지원한 바 있다.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장제스 총통이 한국의 자유 독립을 주장해 조선독립 조항이 삽입됐으며, 양국 수교 후 50년대 초에는 한국이 양식 부족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김신 대사의 요청으로 장 총통이 식량을 지원한 바도 있다.”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 대사를 장 총통은 집안사람으로 여겼다. 장 총통의 최측근이자 초대 한국대사 샤오위린은 대사관저가 김구 선생이 살던 곳인 걸 알곤 암살 장소인 서재를 침실로 바꾸고 꿈에서라도 김구 선생을 만나길 고대했다. 한국전이 발발하자마자 파병 의사를 밝힌 나라가 대만이었다. 미국의 지속적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중국의 부상 이후엔 물론 달라졌다. 일본(1972년), 미국(1979년)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는 단교했다. 우린 노태우 정부 때인 92년 8월이었다. 우리가 아시아권에서 마지막까지 수교국이었으니 의리 있었다고 할 순 있으나 대만은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막판까지 잡아떼서다. 노 대통령은 5월에도 “새 친구를 얻기 위해 옛 친구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단교를 며칠 앞두고서야 대만대사에게 “한·중 간 실질적 진전(substantial progress)이 있다”고 언질을 줬다. 내심 대만이 명동 대사관을 팔아버릴까, 노 대통령의 임기 내 한·중 수교와 9월 말 중국 방문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만 했다. 일본이나 미국이 고위급을 보내 사전 설명했던 것과 달랐다. 하물며 중국도 7월 중순 김일성에게 설명했다.
외교관(노창희)의 술회다. “그때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어도 대만의 불만과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대만으로 하여금 그렇게까지 깊은 배신감을 느끼게 해서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선 우리의 입장에서도 반성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문제는 우리가 좀 더 일찍 대만 측에 사전 통보하고 좀 더 진지하게 장래 문제에 대해 협의하는 자세를 보이지 못한 데 있었다.” 실제 양국 간 항공 노선이 복원되는 데 12년 걸렸다.
당시 대만 대사관 1등 서기관이었던 조희용은 지난해 펴낸 책(『중화민국리포트 1990-1993』)에서 이런 외교의 고질적 문제로, 정권마다의 단기적 성과지향에 외교 당국이 매달리면서 대국 몇 나라와 북한 중심의 외교를 하다 보니 여타 주요 국가와 중·소국에 대한 시의적절한 배려와 투자를 소홀히 한다는 취지의 비판을 했다.
외교적 격변기다. 당시 북방외교란 큰 방향은 옳았다. 대만 다루기엔 미흡했다. 이번엔 한·미·일 협력 강화가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북·중·러를 다루는 세기(細技·세심하게 다루는 기술)가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진심으로 나아졌길 바란다.
참고로 왕 교수는 긍정적인 얘기를 더 많이 했다. 한국과 대만이 비슷한 처지라 협력할 게 더 많을 거라면서다.
고정애 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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