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도련님'은 왜 세상을 떠돌게 됐나

이준목 2023. 9. 1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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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이준목 기자]

김삿갓(1807-1863)은 조선 후기의 선비이자 시인으로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다. 김삿갓이란 예명은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으면, 본명을 감추고 '김립(金笠, 삿갓)'이라고 대답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예명처럼 김삿갓은 인생의 대부분을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했다.

글을 쓰고 시를 짓는 능력이 출중했던 김삿갓은 평생 '비주류'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만으로 불멸의 명성을 이룩해낸 독특한 인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감삿갓은 당대에 가문을 잘못 타고난 죄로 평생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했다는 점에서, 곧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비운의 천재이기도 했다.

9월 13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73회에서는 '가정도 가문도 버린 떠돌이, 김삿갓은 어떻게 조선의 아이돌이 됐나'편을 통하여 방랑시인 김병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조명했다.

김병연이 김삿갓이 된 계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김삿갓은 1807년(조선 순조 7년) 경기도 양주목에서 김안근의 2남으로 태어났다. 감삿갓의 가문은 당시 조선 최고의 명문 세도가이던 '장동 김씨(신 안동 김씨)' 가문으로, 김삿갓이 태어날 무렵 장동 김씨가 사실상 국정을 장악하는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가 서서히 시작되어가던 시기였다.

명문가의 도련님으로 태어난 김삿갓은 밝은 미래가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는 어쩌면 세도정치 시절 가문의 덕으로 출세하여 안락한 삶을 누린 수많은 장동 김씨 중 한 명으로만 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동 김씨 가문의 '도련님' 김병연이 평생을 '김삿갓'으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그의 조부인 김익순(1764~1812) 때문이었다. 1811년 벌어진 '홍경래의 난'은 김삿갓과 그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과 지역차별에 저항하며 평안도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중 봉기였다. 초기에 홍경래군은 파죽지세로 선천 일대까지 밀고 들어왔다. 당시 선천을 다스리던 부사가 바로 김익순이었다.

김익순은 고립되어 전세가 불리해지자 결국 반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2년 뒤 홍경래의 난이 정부군에 의하여 진압되면서, 관리로서 반군에 항복하고 협조까지 한 김익순은 대역죄인으로 몰리게 되었다. 설상가상 김익순이 처벌을 면하기 위하여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서 전과를 조작한 것까지 적발됐다. 김익순은 결국 능지처참을 당했고, 연좌제에 따라 가족들까지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김삿갓의 나이는 불과 5살이었다.

위험이 닥쳐오는 것을 파악한 김삿갓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도주한다. 이제 김삿갓은 더 이상 당당한 장동 김씨 가문의 도련님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의 후손으로 평생 신분을 감추고 살아야하는 잔반(殘班, 몰락한 양반)으로 전락한 것.

형과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도피한 김삿갓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양반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서당에 다니며 꾸준히 공부했다. 김삿갓은 어릴때부터 글공부를 좋아했고 시를 쓰고 글을 짓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김삿갓이 8살일 때 하루는 훈장님이 말썽꾸러기인 그를 훈육하기 위하여 갈지(之)만 12개를 써서 어려운 시제를 제시했는데, 김삿갓은 보란 듯이 '옥지(屋之)'라는 시를 지어 화답했다.

'옥지상지등지(屋之上之登之) 조지추지집지(鳥之雛之執之) 와지락지파지(瓦之落之破之) 사지노지추지(師之怒之撻之)'로 이어지는 시의 내용은 '지붕에 올라가서 새를잡으려 하다가 기와가 떨어져 깨지니, 스승이 노하여 종아리 치시네'라는 뜻이다. 마치 현대의 프리스타일 래퍼를 연상시키는 김삿갓의 뛰어난 순발력과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원래 김삿갓을 크게 혼내려고 했던 훈장님은 제자의 범상치 않은 천재성을 알아보고 말문이 막혔다고.

1815년, 조선 조정이 반역자 색출을 중단하면서 한숨을 돌리게 된 김삿갓의 가족은 다시 재회하여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그나마 김삿갓의 가족이 대역죄에 연루되고도 멸문지화를 면한 것도 당시 세도가였던 장동 김씨의 후광 덕이었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그러나 장동 김씨 가문은 김익순을 '가문의 수치'로 규정하며 그 가족을 족보에서 지우겠다고 선언한다. 분노와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 김안근은 화병으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김삿갓의 가족은 세상의 손가락질을 피하여 강원도 영월로 이주한다. 청년으로 성장한 김삿갓은 양반집 규수였던 황씨와 결혼하고 세 아들을 둔 가장이 됐다. 김삿갓은 재능을 살려 아이들의 글공부를 가르치는 훈장일을 하는가 하면, 몸을 쓰는 궃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힘겹게 생계를 꾸려갔다. 하지만 몰락한 잔반이라는 이유로 지방에서도 학부모들에게 종종 멸시를 당해야 했다.

김삿갓은 고단한 인생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과거(科擧) 시험에 도전한다. 당시 조선은 과거시험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식년시(式年試) 외에도 별시(別試)가 종종 열리고 있었다. 실제로 김삿갓같은 잔반 중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에 오른 이들도 있었다. 김삿갓은 과거에 합격하여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했다.

야사에는 김삿갓이 한양으로 올라와 '김난'이라는 가명을 쓰고 세도가의 문객 생활을 했으며 과거 시험에 응시하려는 세도가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인맥과 명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삿갓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뛰어난 글솜씨로 양반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해졌다고 한다.

또다른 야사에서는 김삿갓이 한양이 아니라 영월의 '향시(지방에서 치러지는 과거)'에 응시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김삿갓은 여기서 장원급제를 차지하고 집으로 금의환향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김삿갓의 과거 시험 내용을 듣고 돌연 눈물을 쏟아냈다.

놀랍게도 과거시험 시제는 '홍경래의 난에 투항한 김익순'이었다.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것을 몰랐던 김삿갓은, 출제자의 의도을 파악하고 김익순을 '만 번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으로 규정하여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김익순이 너의 할아버지다"라는 진실을 들려준다. 큰 충격을 받은 김삿갓은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게 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김병연이 김삿갓이 된 계기'로 가장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야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문가들은 '김삿갓이 과연 김익순의 존재를 몰랐을까'라고 지적한다. 당시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이들은 시험지에 자신의 본관을 반드시 기재해야 했으며, 설사 아무리 몰락한 잔반이라도 자신의 가문 족보를 아는 것은 양반들에게는 필수적인 상식이었다. 또한 김삿갓이 과거 시험에 도전한 시기에 하필 할아버지인 김익순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너무 묘하며, 당시의 과거시험 시제로도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김삿갓이 김익순을 비난하는 글을 쓴 일 자체가 없으며, 아예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장 유력하다. <해장집>에는 김삿갓이 '나를 박대하는 바람에 더 이상 문객 노릇을 할 수도, 빌붙어 이름 날려볼 수도 없다고 판단되어 우울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한양에서 문객으로 지내던 김삿갓이 대역죄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차별과 박대를 받았고 견디다 못하여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뛰쳐나왔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입신양명과 명예회복의 꿈이 산산이 무너진 김삿갓은 결국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한다. 김삿갓은 이때부터 삿갓을 눌러쓰고 본인의 이름과 신분을 감춘 채 방랑의 삶을 시작한다.

조선 전국에 울려 퍼진 김삿갓의 명성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방랑을 떠난 지 몇 년 후, 조선 전국에서 김삿갓의 명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김삿갓은 장기인 글쓰기와 시짓기 능력을 살려서 양반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다. <해장집>에는 "백치같기도 하고 광인같기도 하다. 허름한 베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짚신을 끌고 다니는데 때가 낀 얼굴을 씻지도 않는다"며 김삿갓의 기괴한 행색을 묘사하고 있다.

어느날 김삿갓이 시 짓는 소리를 따라 한 양반집으로 들어서자, 양반들은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다들 무시했다. 자신도 시를 한 수 지어보겠다는 김삿갓에게 양반들은 요강을 시제로 제시하며 노골적으로 망신주려고 했다.

하지만 김삿갓은 태연하게 곧바로 '네가 있어 밤중에도 번거롭게 사립문을 열고닫지 않고(賴渠深夜不煩扉) 사람과 이웃하여 잠자리의 벗이 되었구나(令作團隣臥處圍 ) 술취한 사내도 내 앞에서는 단정히 무릎 꿇고(醉客持來端膝跪) 아름다운 여인은 널 끼고 앉아서 살며시 옷자락을 걷네(態娥挾坐惜衣收)'라는 즉석 시를 지어내며 양반들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냄새나고 더러운 물건에 불과하던 '요강'이, 김삿갓의 시를 통하여 아름답고 중요한 물건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체통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의 양반들과 달리, 김삿갓은 요강처럼 소재와 체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다양한 시를 만들어냈다. 시를 좋아하는 양반 계층 사이에서 김삿갓은 현대의 아이돌이나 싱어송라이터와 같은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김삿갓의 시에는 낭만이나 풍류를 넘어선 날카로운 현실 풍자도 자주 등장한다. 묘쟁(墓爭. 묘 다툼)이라는 시에는 '사대부의 여인네를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붙였으니, 할아버지께 붙일까, 아버지에게 붙일까?'라는 귀를 의심케하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만일 '음란마귀'가 쓰였다면 시를 읽자마자 낯뜨겁고 외설스러운 내용이 가장 먼저 연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내용 안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다. 사대부가의 한 여인이 사망했는데 딸의 무덤터를 찾던 양반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이미 할아버지와 아버지 2대가 먼저 묻혀있던 백성의 무덤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것. 힘없는 백성은 억울했지만 양반을 상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당시 해당 백성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김삿갓이 사연을 접하고 신세를 갚기 위하여 '묘쟁'이라는 시를 지어 세상에 알린 것. 김삿갓의 시가 알려지면서 부끄러움을 느낀 양반은 결국 딸의 묘를 이장했다고 한다. 파격적이고 절묘한 시로 백성의 억울함을 해소한 김삿갓의 명성은, 이제 양반들만이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널리 퍼지게 된다.

이밖에도 김삿갓은 '구(拘, 개)'라는 작품에서는 '反愧無力尸位臣(능력없이 자리만 차지한 벼슬아치가 부끄럽다)'라는 문장을 통하여 사람에게 충성스러운 강아지와 비유하여 '무능한 탐관오리는 개만도 못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로 치면 마치 사회비판적인 갱스터 래퍼를 연상시킨다.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김삿갓은 짓궂은 유머감각이 뛰어난데다 독설가여서, 보통의 양반들이 하지 않는 저속한 표현이나 욕설도 신랄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김삿갓은 백성들의 가려운 속을 긁어주는 풍자는 물론이고, 때로는 글을 모르는 백성을 대신하여 고소장을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새 백성들 사이에서는 김삿갓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목소리까지 생겨났다.

김삿갓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를 사칭한 짝퉁 김삿갓이 곳곳에서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겉모습은 흉내내도 김삿갓만큼의 문학적 재능은 없었기에 대부분 금세 들통이 나거나 잊혀졌다. 또한 김삿갓의 행적이 한동안 묘연할 때는 사망설이 돌기도 했다.

백성들은 김삿갓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길거리에 곡풍방월(曲風方月, 굽은 바람과 네모난 달)이라는 시제가 적힌 푯말을 내걸었다. 시를 좋아하는 김삿갓이라면 이를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길을 지나던 김삿갓은 이를 보고 '맑은 바람이 산모퉁이를 만나면 굽어서 불고(淸風山隅曲)', '밝은 달은 창을 통해 비취면 네모나지(明月照窓方)'라는 글을 남겼고.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살아있음을 알게되이 기뻐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김삿갓의 아들 김익균은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헤맸다. 어렵게 아버지를 만난 김익균은 홀로 있는 어머니를 생각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했으나, 김삿갓은 아들을 버려두고 몰래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방랑에 익숙해진 김삿갓은 한 곳에 정착하기를 거부했다. 비록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사연이나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는 별개로, 무책임하게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김삿갓의 씻을 수 없는 과오다.

그렇게 평생 떠돌이로 살아가던 김삿갓은 1863년 57세의 나이에 전라남도 화순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아들 김익균은 아버지가 사망하고 3년 뒤에야 부고를 전해들었다. 김익균은 화순에 있던 김삿갓의 유해를 가족이 있는 영월로 이장했고, 비로소 김삿갓은 기나긴 방황을 끝내고 영면에 들 수 있었다. 오늘날도 영월 곳곳에서는 김삿갓 문학관과 문학제, 가족들이 살았던 생가 등 김삿갓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김삿갓은 보수적인 조선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가 아닌 외부 환경으로 인하여 소외된 '아웃사이더'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저항하며 자신의 흔적을 남겼고 백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방랑자로서 그의 삶은 처절하고 고독했지만, 그가 남긴 시와 글에 담긴 저항과 풍자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오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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