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달려와 4시간 만나고 끝…김정은, 푸틴 없이 '나홀로 순방' 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박4일간 2700km를 달려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지난 13일 4시간여 만난 뒤 헤어졌다. 회담을 마친 푸틴은 자국 언론에 “김정은이 군수공장이 있는 하바롭스크 콤소몰스크나아무레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14일 “15∼16일 김 위원장이 러시아 내 다른 두 도시를 방문하면서 군사 관련 시설을 둘러볼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지금부터 김정은의 일정은 ‘초청국’ 정상인 푸틴과의 동행이 아닌 사실상 ‘나홀로 순방’ 형식으로 진행된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전날 “정상회담은 13일 하루로 종료됐다”고 밝혔고, 북한 역시 14일 관영매체를 통해 김정은이 “로씨야(러시아) 지도간부들과 무력 육해공군 명예위병대의 환송을 받으며 다음 방문지로 출발했다”며 이를 공식화했다.
실제 러시아 크렘린궁 홈페이지에는 푸틴이 김정은과의 정상 만찬 불과 2시간 10분 뒤 참모들을 대동하고 아무르주 인근 가스처리 공장을 방문한 사실을 게시했다. 김정은은 홀로 남겨둔 채 ‘통상 업무’로 빠르게 복귀했다는 의미가 된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측 고위인사가 참여하는 김정은의 다음 공식 일정은 정상회담 사흘 뒤인 오는 16일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의 회동이다. 그 전까지 김정은은 러시아 측의 별도 의전 없이 홀로 러시아의 군시설 등을 둘러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 매체들이 쇼이구가 김정은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만남(встреча)’으로 표현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전문가들은 통상적이지 않은 이런 의전에 대해 “러시아가 필요에 의해 김정은을 부르긴 했지만, 전통적 사회주의의 수직적 위계에 따라 북한을 사회주의 종주국과 위성국가의 프레임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란 해석을 내놨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푸틴이 이례적으로 30분을 기다려 김정은을 만나는 등 의전을 갖춘 것은 당장 필요한 무기를 지원받기 위해 다소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 측면이 있다”며 “반면 원하던 것을 얻은 뒤 보인 김정은에 대한 처우가 전통적인 수직적 북ㆍ러 관계의 본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ㆍ러 정상이 공식적으로는 전방위 협력을 언급했지만, 러시아는 북한을 후방 물자 보급 창구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고 했다.
김정은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싱가포르에 갔을 때는 회담 전날 ‘깜짝 밤외출’에도 싱가포르 외교장관이 동행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럼에도 정상회담이 끝난 뒤 혼자 러시아의 첨단 무기 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시설을 돌아보기로 한 데는 상대적 선진국인 러시아의 시스템을 본받을 필요성이 작용했을 수 있다. 이를 모방해서라도 스스로 제시했던 성과들을 조기에 달성하지 못한다면 리더십의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푸틴의 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했지만 지난 10일 오후 평양을 출발한 뒤 이날까지 4박5일간 러시아가 제공하는 숙소에도 머물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모든 숙박 장소는 타고 온 열차이고, 식사 역시 푸틴과의 공식 만찬 외에는 열차에서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경호와 보안을 이유로 장소가 노출되지 않게 조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언론 보도를 근거로 한다면 외국 정상 방문시 원하는 최고급 호텔에서 묵을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통상적 상황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 정치체계의 특성상 김정은은 만기친람(萬機親覽ㆍ모든 정사를 친히 보살핌)형 리더십으로 모든 분야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며 ”북한은 그동안 ‘수령’이 제시한 목표를 그나마 달성했기 때문에 유지돼 왔는데, 만약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스스로 제시하지 못할 경우 리더십에 균열이 온다는 우려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어 “같은 논리로 김정은은 북ㆍ미 회담을 위해 2018년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예상을 깬 시내 관광을 했는데, 그 역시 회담 성공을 전제하고 향후 북한 관광산업의 대안을 스스로 제시하려고 했던 의도로 볼 여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를 대외적 자신감의 표출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오랜 기간 자리를 비워도 리더십이나 북한 체제에 아무런 이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홀로 해외 일정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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