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르포]전략적 모호성으로 실리 챙기는 ‘글로벌 사우스’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8일(현지시간) 자카르타 대통령궁에서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내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지난해 5월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이 가장 빈번히 만난 외국 정상으로는 조코 위도도(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7월 조코위가 먼저 방한했고 11월에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올해 5월에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재회했고, 이달에는 자카르타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한-인니 수교 50주년을 기념했으며 다시 3일 뒤엔 인도에서 열린 G20에서 또다시 조우했다. 최소 다섯 번은 얼굴을 마주했다는 얘기다.

인니는 인구가 2억7000만명으로 미국에 이어 네 번째 인구 대국이다. 국내총생산(GDP)은 2022년 1조3000억달러 규모로 한국(1조6000억달러)의 80%를 넘어섰다. 2022년 경제성장률은 5.3%에 이른다.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 수천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해양 국가이자 천연자원 대국인 인니는 여러 측면에서 한국과 정반대의 위치에서 뚜렷한 국제적 위상을 차지하다보니 양국 정상이 국제회의에 패키지처럼 함께 붙어 다니게 되었다.

인니만 주목받는 것이 아니다. 세계적 기업들도 남쪽 지역 국가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베트남과 인니를 포함한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지역 전반은 물론 14억 인구 대국 인도에 대한 관심도 전례 없이 뜨겁다. 관련 포럼에 사람이 쏠리고 신간 서적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 이 같은 인기의 배경은 인니와 인도를 포함한 남반부에 대한 지정(地政)학적인 가치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재평가= 이러한 지역 갈등을 싸잡아 ‘남국(南國) 문제’라 부르기도 했는데, 경제적으로는 ‘개발도상국’, 정치적으로는 ‘제3세계’ 또는 ‘비동맹 국가’로 호칭했다. 지구 적도에 가까우며 산업화와 국민 소득 수준이 낮으며 정치·경제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지역에 대한 부정적 호칭이다. 최근 이러한 표현을 대체한 게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다. 부유한 북반구를 통칭한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와는 반대되는 개념이었지만 근래 폭발적으로 쓰임새를 늘렸다.

여기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도 포함되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지역은 "인도+아세안 지역"이다. 이 두 지역의 인구만 20억명으로 과거엔 빈곤과 경제 격차가 주요 화두였지만 이제는 전략적 위치, 풍부한 인구와 자원, 외교적 가치, 경제성장 잠재력이라는 긍정성이 주목을 끌고 있다. 학자들은 ‘글로벌 사우스’가 단순히 포괄적 지역 개념이 아닌 제3세계의 선도국가인 인도의 외교 전략으로 진화했다고 보기도 한다. 마치 중국의 글로벌 공급망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처럼 말이다. 중국이나 미국처럼 돈과 무기로 국제사회의 환심을 살 수는 없지만 특유의 느슨한 연대를 통한 ‘허허실실(虛虛實實)’ 전략으로 실리를 챙기겠다는 뜻이다.

남쪽 아시아의 가치가 급등한 첫 번째 배경은 중국의 부상이다. 최근 아세안 관련 회의의 첫 번째 화두 역시 중국과의 남중국해 갈등이다. 전통적으로 해양 전략이 부족했던 중국에 있어 남중국해에서의 군사작전권은 초강대국 도약으로의 필수조건에 가깝다. 아세안 국가들의 해양 권리를 침해한 9단선(최근엔 10단선)이 바로 그러한 조바심의 산물이다.

이 같은 중국의 태도는 바다로 상호 연결된 아세안에는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다가왔다. 특히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해양부 아세안의 불만이 뜨겁다. 자연스레 대중국 포위 전략을 구상 중인 서방에 이들은 절대 놓칠 수 없는 파트너로 부상했다. 이번 아세안 정상회의에서도 확인되었듯 중국과 아세안의 외교전은 뜨겁고 복잡한 관계로 진화 중이다.

중국은 남중국해 문제를 놓고는 아세안 국가별로 맞춤 협상에 나선 상황. 나라별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줌으로써 제해권과 우방 모두를 놓치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반대로 아세안은 스스로를 유럽처럼 하나의 공동체로 설정하고 중국과의 포괄적 협상에 나섰다. 그렇다 보니 아직은 아세안에서 뚜렷한 ‘강펀치’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처럼 친중 국가의 적극적 협조가 없기 때문이다. 미얀마와 태국 역시 미지근한 위치다.

아세안의 이 같은 지지부진한 태도까지도 고도로 계산된 행동이라는 분석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서방세계는 남중국해 갈등의 최전선인 베트남에 쏟는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베트남 하노이를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10일 정상회담을 열고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 관계로 격상시켰다. 미국 기업들의 베트남 투자도 잇따르고 있다. 아세안은 이처럼 전 세계의 관심이 남중국해로 쏠리는 현상이 절대로 싫은 눈치가 아니다. ‘중국의 위협론’은 뚜렷한 지정학적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는 뜻이다.

◇모호하고 까다로움= 이처럼 ‘글로벌 사우스’ 전략의 핵심은 바로 전략적 모호성으로 압축된다. 뚜렷하게 한 쪽 편을 들지 않겠다는 얘기로 이는 과거 냉전 시대 ‘비동맹 운동’과 흡사하다. 이런 움직임의 정점에 인도가 존재한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인구 14억명)이자 세계 5위의 경제 대국이지만 1인당 소득은 G20 국가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최근 인도의 부상은 가장 낮은 경제력을 가장 큰 잠재력으로 해석하게 만든 덕분이다. 최근 우주선을 달에 보낸 인도는 디지털과 모바일 분야에서도 가장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는 나라가 되었다. 오늘날 인도에는 10억명에 가까운 모바일 인터넷 사용자가 존재하고 여기서 창출되는 디지털 모바일 경제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인구와 영토가 그리고 영어 환경이 글로벌 경제의 구미를 당겼다.

동시에 서방 주류 사회와의 관점 차이점도 뚜렷하다. 최근 선진국들이 관심을 가진 기후변화, 우크라이나 사태,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 문제에 있어 인도는 명확하게 개발도상국의 입장을 대변한다. 9월11일 폐막한 G20 정상회의에서도 서방세계는 러시아에 대한 비난을 기대했지만, 끝자락에 발표된 공동선언문은 "모든 국가는 영토 획득을 위해 위협이나 무력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언급에 그쳤다. 러시아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글로벌 사우스가 맹목적으로 서방을 추종하지 않는 게 증명됐다"고 기뻐했을 정도. 실제로 인도를 포함한 상당수 남쪽 국가들은 무기 체계는 물론 석유 거래에 있어 러시아와 오랜 우호 관계는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에도 중립을 지켜왔다. 이선진 전 인도네시아 대사는 "아세안을 포함한 글로벌 사우스의 전략은 ‘절대로 적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미·중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로 지역의 안정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며 "우리도 참고하고 배워야 할 지혜가 여럿 있다"고 평가했다.

정호재 고려대 아세안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