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굳이 화실로 가는 이유
[박희종 기자]
어렵게 수채화를 시작했다
비도 오는데 갈까 말까? 가끔은 화실 가기가 싫고, 비까지 오니 날씨를 핑계 삼아 보고도 싶다. 아내의 눈치를 보니 말이 없는 것은 그냥 가자는 뜻이다. 일찍 저녁을 해결하고 화실로 가는 발걸음, 왜 이런 수고를 해야 할까?
가끔 화실행 운전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다. 수강료에 재료비 등,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한데 아내와 같이 하고 있어 만만치도 않고, 시골살이를 자처했으니 먼 거리라는 어려움도 있다. 얼른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화실 행, 아내와 함께 다닌 지도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이다.
프랑스 몽마르트르 언덕을 연상치 않더라도 들판에 앉아 그림 그리는 사람은 품위가 달라 보였다. 얼굴은 검게 그슬렸고 허름한 옷차람이지만, 몸에서 풍기는 품위를 따라갈 수 없었다.
▲ 파도를 찾아서 수채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재거리다. 어떤 것을 그려야 할까? 전국을 여행하면서, 외국여행을 하면서 언제나 가슴엔 그림이 숨어 있다. 멋진 그림을 꿈꾸며 동해안 파도를 만났다. 추운 겨울날에 만난 시원한 파도를 그려보려 감히, 생각해보는 수채화의 초보자다. |
ⓒ 박희종 |
아내와 함께하는 수채화, 남들은 부부의 취미가 같아 얼마나 좋겠냐며 전시회를 해보라는 권유도 한다. 아내와 함께 해서 좋은 점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있기에 웃음으로 대신하고 만다.
미술은 나에겐 어려웠다
어렵게 수채화를 시작하고 한두 달이 지나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림을 그려야 할까 아니면 집어치우고 말까? 젊은이들 틈에 이순(耳順)에 가까운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어색해서였다. 어느 날 화실에 신입생이 찾아왔다. 선생님의 소개로 인사를 하고 기초부터 연습을 한다. 어렵게 딸의 재촉과 닦달로 화실을 찾았단다.
선 그리는 연습부터 시작하는 초년생, 조금은 어색한 표정이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평생 그려왔던 선을 또 그리다니. 선을 그려야 하느냐는 질문에 선생님, 선은 그림의 기초라면서 꾸준히 올 것을 당부한다. 어렵게 한 시간의 연습이 끝났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기도 하고, 팔을 허공에 돌려보기도 한다. 세상에 만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던가?
▲ 파도의 몸짓 파도의 작품이 탄생했다.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그림을 그려냈다. 긴 시간을 투자해 만들어낸 수채화는 다시 얻을 수 없는 희열이었다. 한번쯤 도전해 봐도 좋을 듯한 노년후의 재산이다. |
ⓒ 박희종 |
화실에 오기 전까지 미술에 관한 많은 것이 궁금했다. 미술이 어떤 것이고 작가들의 세상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화가는 오로지 그림만 그리는 사람인지 알았다. 도화지와 물감만 있으면 얼렁뚱땅 그려내는지 알았지만 화가도 그림을 그려서 팔고,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이었다. 화가도 세월을 살아가면서 그림은 서서히 익어가고, 하나씩 얻어가는 고단한 세월이었다. 작가의 고단한 땀과 정열이 빚어 놓은 생명과 같은 보물이었다.
수채화를 한다는 말에 그림 한 점을 달라 한다. 화실에 오가기 전의 내 생각과 어떻게 그리 같을까? 오래전에 수석을 수집하던 시기가 있었다. 참신한 수석 한 점 속엔 절절한 사연과 이야기가 있다. 여느 사람은 알 수 없는 처절한 사연들이 수석 한 점에 녹아 있다. 배낭을 메고 하루종일 냇가를 헤매면서 운이 좋아야 한 점 얻어 올 수 있다. 하루 종일 산과 들을 거닐어도 빈손일 수 있고, 며칠을 헤매도 빈 배낭인 경우가 허다했다.
아는 친지가 찾아왔다. 거실에 놓여 있는 멋진 수석 한 점만 달라고 한다. 냇가에 가서 다시 주워오면 될 것이 아니냐는 설명이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임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림을 한 점 달라 하는 사람, 고단하고도 기나긴 세월을 알지 못하기에 하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아직은 버티어내고 있다
모든 것이 어렵지만 그림도 어렵고, 음악도 어렵다. 물과 물감의 조화가 신비스럽지만 그림 그리기는 정말 어렵다. 악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은 신비하지만 연주하기는 어렵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으니 그림도 아직도 어렵기 마찬가지다. 꾸준히 화실을 오가면 무엇인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아직도 버티고 있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한참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림은 나아지지 않는다. 기나긴 세월을 그리고 또 그렸는데도 좋아지는 기미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집어치울까도 생각해 보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아까워 망설이게 된다. 한참의 세월이 흘러가고 작품 수는 늘어갔다. 그림이 지루하던 어느 날, 갑자기 벽에 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저 그림은 왜 저런 색을 택했을까? 밝고 어두움이 바뀐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에 오래 전의 작품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와, 저것은 왜 저렇게 그렸을까? 오래 전의 그림이 부끄럽기도 하고, 전시회에 출품했다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 동호회 전시회 모습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 그림이다. 특별할 사람만 할 수 있는 영역을 도전하듯이 시작한 수채화, 꾸준한 노력으로 전시회를 할 수 있었다. 감히 다가 갈 수 없는 영역이지만 노년의 훈훈한 재산이 되고있어 한 번쯤 도전해 볼만한 취미이기도 하다. |
ⓒ 박희종 |
친구들이 '화백'이라 한다
아내와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화실을 드나들었다. 우선은 나와의 약속이 중요했고, 가난이 막아섰던 오래 전의 아픔을 치유하고 싶었다. 이왕 시작한 모험을 쉽게 멈출 수 없었던 수채화가 생각지도 않았던 좋은 일이 생겼다.
내년이면 아내는 추천작가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후년 정도이면 추천작가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화가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며 관심도 없이 그려온 수채화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도 단위 추천작가에 근접해 있으니 무모함치고는 그럴듯하지 않은가?
소중하게 주어지는 삶의 시간을 뜻있게 보내보자는 생각이었다. 끊임없이 화실을 오고 간 대가로 제법 그럴듯한 수채화가 되어가고 있다. 세월이 더 익어가면 그림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느낌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나의 아이들은 어떤 아비로 그리고 무엇을 하던 할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을까?
가끔 친구들이 불러주는 '화백'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리고 싶어 드나든 화실이다. 서서히 세월이 흘러 조금은 알 것 같은 수채화가 되어가고 있다. 끊임없는 발걸음이 만들어 낸 소중한 수채화다.
먼 훗날,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 한 마디 해 주었으면 좋겠다. 수학선생이 아닌, 그림 그리던 사람이었다고. 가끔 색소폰을 부는 사람이 수채화도 그렸다고. 먼 훗날 한 번쯤 들어보면 괜찮을 듯한 상상의 뒷말이다. 노년에 시간을 보내기는 더없이 좋은 취미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누구나 취미로 해볼 만한 수채화의 체험 이야기다. 오마이뉴스에 첫 번째로 게재하는 글이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속보] 검찰, 뉴스타파·JTBC 동시 압수수색... 뉴스타파 스크럼 짜고 막는중
- 국민연금 개혁안? MZ세대들에게 날벼락인 이유
- 문재인 부친 물고 늘어지는 보훈부장관의 우문, 놀랍다
- 이들과 뭘 하려고? 윤석열 정부 장관들의 무서운 공통점
- 박민식 '정율성 저격' 동조 시민단체 성명, 여당 의원 보좌관이 썼다
- 들어보셨나요? 기내식 말고 해발 4000m 화산식
- 일일 좌석 3만석↑ 30% 할인까지... 이 파업을 응원한다
- 푸틴, 김정은 답방 요청 수락... 북러 밀착 가속도
- 리비아 대홍수로 1만 명 실종... 이미 '경고'는 있었다
- 과거 막말 재조명 받는데... 유인촌 "재활용" 괜찮다는 하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