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짜리 연극, 우리 모두를 성장시켰어요”
올 하반기 연극계 최대 화제작은 단연 국립극단의 ‘이 불안한 집’(~9월 24일까지 명동예술극장)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토대로 영국 극작가 지니 해리스가 2016년 썼으며 김정(39)이 이번에 한국 초연 연출을 맡았다. 이 작품의 상연시간은 2차례의 중간휴식(15분) 포함해 무려 5시간. 짧은 동영상 콘텐츠가 유행하는 요즘 이렇게 아날로그의 극단을 달리는 연극이라니…. 하지만 이 작품이 화제를 모으는 것은 단순히 긴 공연시간 외에 작품의 높은 완성도 덕분이다. 덕분에 회차를 거듭할수록 객석의 빈 좌석이 빠르게 줄었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기원전 458년 고대 그리스 최대 축제였던 디오니소스 축제 비극 경연의 우승작으로,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로 이뤄져 있다. 전체 제목인 ‘오레스테이아’는 오레스테스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 승리를 위해 아가멤논이 딸 이피지니아를 제물로 바쳐 죽이자 이에 분노한 아내 클리템네스트라가 승전하고 돌아오는 남편과 포로 카산드라를 살해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여동생 엘렉트라와 함께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며, ‘자비로운 여신들’은 어머니를 살해한 죄로 저주받은 오레스테스가 신들의 재판을 받는 내용이다.
이에 비해 ‘이 불안한 집’은 원작처럼 3부로 이뤄졌지만, 고전을 재해석한 1‧2부와 함께 현대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3부로 구성돼 있다. 오레스테스(남재영)가 중심인물인 원작과 달리 ‘이 불안한 집’은 클리템네스트라(여승희)와 엘렉트라(신윤지)가 중심이다. 특히 아가멤논(문성복)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이는 인물이 오레스테스가 아니라 엘렉트라로 바뀌었다. 원작과 비교할 때 심리적인 측면을 더하고 여성을 무대의 중심에 배치한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매력이다. 이어 3부에서는 원작에서 오레스테스가 아테나 여신의 재판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는 것과 달리 원작에 없던 캐릭터인 정신과 의사 오드리가 엘렉트라와 상담하며 어린 시절 부모 살해의 트라우마를 맞닥뜨리는 내용이다. 1·2부의 혼돈과 증오에서 벗어나 3막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음으로써 관객에게 한줄기 안도감을 준다.
국립극단의 ‘이 불안한 집’이 5시간이나 되는 긴 상연시간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몰입시키는 데는 희곡의 매력을 무대 위에 묵직하게 풀어낸 연출의 역할이 크다. 좌우 양쪽 2개의 경사로로 연결된 2층 구조의 무대와 가운데 놓인 거대한 바위는 다양한 동선을 만들어내며 5시간 질주하는 연극의 지루함을 더는데 기여한다. 여기에 엄청난 양의 대사를 소화하면서도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낸 배우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최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연출가 김정은 “‘이 불안한 집’과 만날 운명이었던 것 같다. 6년 전 (희곡 전문 번역가) 성수정 선생님이 이 작품의 초벌 번역을 한 뒤 연락을 했는데, 당시엔 너무나 방대한 내용에 연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1~2차례 이 작품과 인연이 닿았지만 아직은 연출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희곡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면서 “지난해 국립극단에서 이 작품을 맡는 것으로 결정된 후 희곡을 읽었는데, 정말 잘 쓰인 작품이라 읽자마자 전율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김정은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 2009년부터 6년간 연출가 한태숙의 조연출로 일했다. 2015년 연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으로 연출가 데뷔를 한 그는 2017년 고연옥 작 ‘손님들’로 동아연극상 작품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2020~2022년 경기도극단 상임연출가로 활동하면서 아서 밀러 작 ‘시련’ 등을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동안 축적된 그의 내공이 ‘이 불안한 집’에서 제대로 발휘됐다는 평가다. 연극계에서는 이번 작품을 통해 그가 연출가로서 한층 성장했다며 호평 일색이다.
그는 “그동안 그리스 비극을 한 적도 없고, 영어 번역극도 ‘시련’을 빼면 없다.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기 때문에 이번 작품은 연습을 앞두고 캐릭터 분석 등 초반 작업에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동안 연출했던 작품들 가운데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면서 “긴 호흡의 작품인 만큼 개막 한 달 전부터 런스루(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지 않고 연습하는 것)를 하며 아쉬운 부분들을 매끄럽게 잇는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작품은 김정만이 아니라 배우들에게도 큰 도전이다. 긴 호흡 속에 엄청난 양의 대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우들 모두 존재감이 있지만 클리템네스트라 역의 여승희는 특히 두드러진다. 지난 4월 국립극단의 ‘창작공감: 작가’ 시리즈 중 이소연 작 ‘몬순’에 나오긴 했지만, 작품 규모나 공연 기간 등을 고려할 때 이번 ‘이 불안한 집’에 관객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는 무대가 됐다.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연극과 뮤지컬을 중심으로 3~4년 활동하다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석사과정에서 뮤지컬 연기 전공을 한 뒤엔 영국과 스웨덴에서 뮤지컬 ‘미스 사이공’ ‘렌트’ 등에 출연했다.
여승희는 “영국에서 2010년부터 뮤지컬 무대에 출연하다 보니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 지난해 7월 국립극단의 시즌 단원 오디션을 봤다”면서 “‘몬순’보다 먼저 ‘이 불안한 집’의 캐스팅이 결정됐다. 클리템네스트라는 국립극단에서 처음으로 내게 주어진 배역인데, 배우라면 탐내는 강렬한 역할이어서 기뻤다”고 말했다.
국립극단은 2021년부터 시즌 단원 오디션에 이듬해 작업이 예정된 연출가를 참여시키고 있다. 김정은 지난해 오디션에서 여승희를 보자마자 클리템네스트라 역으로 낙점했다. 173㎝인 여승희의 큰 키도 한몫을 했다. 김정은 “신화 속 인간인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가 무대에 등장할 때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보였으면 했다”면서 “여승희 배우와 함께 187㎝인 문성복 배우가 상상하던 캐릭터에 잘 맞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여승희는 “한국에서는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펴이지만, 북유럽에서는 그렇지 보지 않아서 ‘미스 사이공’ 스웨덴 프로덕션의 킴 역할을 했다”며 웃었다.
원작자 지니 해리스는 2016년 영국 일간지 ‘더 헤럴드’ 인터뷰에서 원작인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가장 탐구하고 싶은 존재로 클리템네스트라를 꼽은 바 있다. 클리템네스트라는 남편에게 복수하지만 약한 존재인 카산드라를 죽이는가 하면, 원치 않았지만 자식들에게 가족살해의 트라우마를 넘겨주는 등 극 중에서 가장 고통을 겪는 존재다. 여승희는 “극 초반에 클리템네스트라가 죽은 아이의 혼령을 찾으며 처음 등장해 대사를 하는 장면이 이번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면서 “무대에서 워낙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에 배우들은 분장실에서 다들 기진맥진해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나를 비롯해 배우와 스태프 등 모두를 성장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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