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가 생각나는 계절, 가을

전미경 2023. 9. 1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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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수술로 올해 못 딴 송이... 엄마, 내년엔 같이 따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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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경 기자]

"할머니 다리가 예뻐졌다."     

주말에 온 조카 지나는 할머니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정말 예뻐졌니라고 묻자 "응, 다리가 곧게 펴졌잖아. 키도 커지고"라며 할머니와 같이 돌담길을 걸어주었다. 그리곤 "할머니 잘 걷는다. 열심히 하신다"라며 응원했다.

엄마는 무슨 힘이 나셨는지 정말 잘 걸었다. 혼자서도 담벼락길을 씩씩하게 왕복했다. 지나는 "할머니 빨리 나아서 나랑 같이 걸었던 산책길 다시 산책해요"라고 했다.      
가을인가. 아침 햇살이 따뜻하다. 하늘은 맑다. 가을빛이 좋은 이맘때면 산행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벌초를 가는 사람도 있지만 송이버섯 채취를 위해 산행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웃에 사는 아무개 아저씨는 이제 늙어서 갈 수 없다며 손주뻘 되는 친척에게 송이 장소를 알려주기 위해 산행을 간다며 가게에서 빵과 주스를 샀다.

20년 동안 혼자 알고 있던 비밀의 장소였는데 이제 그 장소를 물려주기로 했다며 한바탕 떠들고 가신다. 가게에 앉아 놀던 이웃들은 저마다 송이에 대한 추억들을 꺼내놓았고, 엄마도 오래전 송이 산행의 추억을 꺼내 놓으셨다.
 
 송이버섯
ⓒ elements.envato
 
당시 엄마는 이웃들과 송이 따러 산에 가셨다. 송이는 다른 버섯과 달리 귀해서 채취가 쉽지 않다.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처음 산에 오른 엄마는 베테랑 이웃들을 제치고 송이를 땄다. 송이는 솔잎 근처에 군락지가 따로 있는데 발견하면 양이 꽤 된다. 양이 꽤 된다는 것이 주관적인데 10여 송이 정도를 말한다.

엄마는 같이 산행했지만 빈손인 이웃들에게 한 개씩 주고 친지들한테도 한 개씩 나눠주었다. 그리고 집에 가져온 몇 송이를 자랑스럽게 내게 보여주었다. 희고 예쁜 자연산 송이. 향이 그윽했다. 맵시 좋고 뽀얀 자연산 송이를 실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몇 년 전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런 날도 있었으니 그때는 분명 엄마 무릎이 괜찮았으리라.  
    
엄마는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때 가게를 봤던 나 역시 덩달아 송이의 추억에 맞장구쳤다. 송이를 따온 엄마는 아까워서 먹지 못하고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금보석보다 더 소중하게 신문지에 잘 싸서. 그때는 왜 그러셨을까 이유를 몰랐다. 가족들 오면 다 같이 먹으려고 했다는데... 그 귀한 송이를 결국 쥐가 다 먹어버렸다.

그 일로 엄마는 두고두고 나에게 체면을 구긴다. 송이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사람들에게 떠벌린다. 엄마가 나랑 먹으면 될 텐데 가족들 오면 다 같이 먹는다고 아끼다 아무도 못 먹고 쥐새끼만 포식했다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씩씩 대는 내 얘기에 사람들은 박장대소 하면서도 내 말에 공감을 표했다.  

가을엔 송이다. 엄마는 며칠 전 송이국을 끓이라며 송이 한 개를 건넸다. "웬 송이야?"라고 묻자 B가 가져왔다고 했다. 산행하는 동네 후배다. 엄마 드시라고 송이 한뿌리와 싸리버섯을 잔뜩 가지고 왔더란다. 혼자 드시기 아까워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이젠 나랑이라도 먹겠다며 꺼내 놓으신 것이다. 후배는 산행할 때마다 봄에는 드룹을 가을에는 버섯류를 가져온다.

물론, 후배뿐 아니라 이웃들은 엄마에게 제철마다 나오는 야채와 농산물을 많이 주신다. 특히 수확하는 계절 가을이면 풍년이다. 마음도 몸도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계절 가을이다. 엄마의 이번 가을은 유난히 더 풍성하다.

고질적인 무릎 수술을 잘 마쳤고 빠르게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가능했고 지팡이 없이도 신작로를 왕복했다. 더 멀리 더 많이 걸었다. 무엇보다 활기찼다. 자신감이 있었다. 멀리 보이는 앞산을 가리키며 벌써 물이 드는 것 아니냐며 가을을 반가워했다. 가을은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수확을 끝낸 감자밭엔 사람들이 감자를 주우러 간다. 남은 감자는 어차피 다 썩어서 버리게 되기 때문에 이웃들 가져가라고 인심을 쓰는 것인데 몇 해 전엔 엄마도 갔었다. 감자가 필요하기 보다 바람 쐬러 가기 위해서.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이다. 생각해 보니 그때만 해도 엄마 무릎은 쓸 만하셨다. 올 봄에는 육백마지기도 다녀오셨다. 무릎 아파 못 간다는 우울한 엄마를 이모가 강제로 데려가셨다. 산을 느끼고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졌다는 엄마는 실력을 발휘해 산나물까지 뜯어오셨더랬다. 불과 한 계절 차이의 변화다.      

엄마에게도 무릎만 괜찮으면 좋은 날이 있었다. 평생 가게를 보는 업이지만 가끔은 산행도 하고 여행도 하셨다. 제주도를 함께 했을 때도 해외 여행을 갔을 때도 무릎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엄마의 무릎이 그렇게 되도록 무심했다.

무릎 수술 후 이제는 새로운 삶을 향해 걷는 엄마의 뒷모습을 본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따라간다. 함께 해서 좋았던 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기에 더 소중하고 그리운지 모른다.

엄마와 고사리 산행을 했던 때가 제일 그립다. 하늘과 맞닿은 광활한 육백마지기 줄기에서 뻗어 나온 산등성이를 뛰어가던 그날. 옆에 두고도 알기 전에는 죽어도 눈에 안 띈다는 고사리의 첫 맛을 엄마가 알려주셨다. 엄마와 환하게 웃던 그런 날이 다시 오리라 확신한다.

엄마는 서울 사는 친구들과 통화를 하면서 마무리 인사가 달라졌다.

"그래 내년엔 육백마지기 같이 가자."
       
통화를 끝낸 엄마는 벌써 내년에 가 있는 듯 벅차 보였다. 아! 엄마도 많이 가보고 싶으셨구나. 어디를 가자 할 때마다 매번 싫다 안 간다 하셨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릎이 안 좋아서 가기 싫었던 것이었는데 무정하게도 그걸 몰랐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내년엔 송이 따러 가야지" 나는 답했다. "응, 엄마 나랑 같이 가자. 송이 따러."

엄마가 곧게 뻗은 예쁜 다리로 어디든 맘껏 가는 날이 오리라. 머지않아. 손녀 지나와 산책도 하고 친구들과 육백마지기도 가고 송이버섯도 따러가는 그날을 기대한다. 그리고 가족여행도 가고. 유난히 아름다운 올해의 가을이 예쁘게 무르익어 간다. 엄마의 삶도 곱게 익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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