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강제’ 종속돼 온 케이팝의 역사 [존중 못받는 케이팝①]

박정선 2023. 9. 14.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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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부터 거슬러 온 '정치권 연예인 동원'의 잔재
잼버리 콘서트 파행, 케이팝 아이돌이동원해 해결

#지난달 1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는 140여개 나라에서 모인 4만여명의 스카우트 대원들이 제각기 구호를 외치고, 국가를 부르는 흥겨운 모습이 연출됐다. 뉴진스와 아이브, 있지, 마마무, NCT드림 등 케이팝(K-POP)을 대표하는 정상급 가수들의 공연을 앞두고 연출된 풍경이었다. 이를 생중계한 KBS2의 시청률은 10%를 넘겼고, KBS월드 유튜브 채널은 최고 동접자수 12만명, 누적조회수 91.5만을 기록했다. 공연 자체만 놓고 본다면 매우 성공적인 마무리였다.

#아이돌 그룹이 속한 기획사의 관계자들은 한숨을 쉬고, 아이돌은 급하게 무대를 준비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아이돌 팬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그룹이 촉박한 일정에서 무대에 끌려나간 것에 눈물을 흘렸고, 축구 팬들은 비싼 잔디가 훼손된 것에 분노했다. 이 콘서트를 통해 이익을 얻은 건 누구인가.

8월 1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잼버리 케이팝 슈퍼 라이브 콘서트' ⓒ사진공동취재단

파행을 겪은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의 마지막을 장식한 ‘잼버리 케이팝 슈퍼 라이브 콘서트’(이하 잼버리 콘서트)의 양면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평가들이다. 콘서트의 일정과 장소가 거듭 변경되고, 라인업이 당장 공연 이틀 전에 확정되는 등 그 과정에서 온갖 잡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된 건 ‘아이돌 차출’ 문제였다. 나라가 행사의 파행을 막기 위한 ‘도구’로 아이돌 가수들을 강제 동원시켰다는 비판이었다. 결국 행사가 끝난 이후 대응 능력이 없는 정치 대신, 아이들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비아냥을 들어야했다.

‘정치권이 연예인을 동원한다’는 논란은 이번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선 정치가 무능할 때 문화로 땜빵하거나, 욱여넣어 해결하려던 유구한 역사가 있다. 그 역사는 무려 70여년을 거스른다.

1948년 이승만 정부 시절,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만들어진 선무공작단은 연예인 강제 동원의 시작점으로 읽힌다. 당시 여수 순천에서 군상부 명령에 반발한 군부대 진압을 위해 출동한 장병을 위로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반공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서둘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선무공작단이다.

이후 선무공작단은 정훈공작단(군예대), 홍보단, 문선대(문화선전대)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장병들을 위한 위문 공연에 연예인들을 다수 동원했다. 군장병 위문 공연의 절정은 월남전 때다. 당시 월남으로 파병간 장병들을 위해 정부는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이미자, 현미, 윤복희 등을 비롯해 코미디언, 배우들을 무대에 세웠다. 여기서 파생되어 1961년부터 국군방송에선 ‘위문열차’로 매주 군부대를 찾아 공연하는 가수들의 모습을 송출하기도 했다.

1996년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연예병사, 즉 홍보지원단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사단 혹은 각 군별로 존재했던 홍보단, 문선대 등을 국방부가 통합관리하겠다면서 만든 보직이었다. 하지만 잦은 외출과 외박, 공연 뒤 안마시술소 출입 사건 등의 일탈 행동 등으로 논란을 일으키면서 여론의 몰매를 맞고 2013년 7월 연예병사 제도는 폐지됐다.

위문 공연 외에도 대통령의 사적인 술자리 등 연회에서 가수를 불러내 마치 하인을 다루듯 하고, 청와대 안가까지 가수를 불러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등 연예인을 동원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10.26 사건) 당시 심수봉과 신재순이 청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는 일화도 매우 유명하다.

2005년 MBC 스페셜에서 방송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편으로 '국풍81'을 조명했다. 사진은 당시 국풍81 공연 무대에 오른 신중현 ⓒMBC

이번 잼버리 사태와 매우 유사하다며 되새겨진 사건도 있다. 취재 과정에서 1981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국풍81’을 언급하는 관계자들도 다수였다. 한 관계자는 “연예인을 국가의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며 “무려 40여년 전에 열렸던 ‘국풍81’ 당시 국민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연예인을 내세웠던 것과, 지금 정부의 무능을 덮기 위해 케이팝 가수들을 동원한 것이 다를 바가 있냐”고 꼬집었다.

이 행사는 당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정부가 주도한 관제 축제였다. 축제 개막 전날인 5월 27일은 5.18민주화운동 1주기를 앞두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신군부에 맞서는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이에 허문도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학원가의 저항을 약화하고 대학생과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기획한 축제가 ‘국풍81’이다. 이 행사에는 조용필과 위대한탄생, 신중현과 뮤직파워,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창완 등 당대 인기 가수들이 대거 출연했다.

물론 두 행사의 성격은 다르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잘못을, 문화 행사로 뒤덮으려 했다는 점에선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당시 1000만명이 축제에 다녀갔다며 성공을 자축했던 ‘국풍81’과 이번 정부가 잼버리 콘서트 당시 참가자들이 즐거워했다는 점을 내세워 성공적인 피날레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그나마 민주화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연예인 강제 동원 등의 문제가 개선되는 듯 보였지만, 이번 잼버리 사태는 여전히 그 잔재들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됐다. 이번 잼버리 사태뿐만 아니라 국가는 중요한 홍보가 필요할 때 언제나 케이팝과 한류를 내세워왔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당시 당선인 신분) 측은 대통령 취임식에 방탄소년단의 공연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지만, 소속사 측이 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일축하면서 정치적인 행사에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 차출되는 게 아니냐는 팬들의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결국 방탄소년단의 취임식 초청 공연은 없던 일이 됐다. 부산 엑스포 유치 홍보에도 방탄소년단을 내세웠고, 이전 정부 때도 케이팝 스타들이 사실상의 국가 홍보 대사 느낌으로 활동해왔다.

한 가요 기획사 관계자는 “잼버리 사태는 정부와 지자체 등이 케이팝 씬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 사례”라며 “케이팝 산업이 커지면서 해외에서 성과를 낼 때는 칭송하다가도 정작 문화산업에 대한 존중은 없다. 팬덤을 의식하며 보여줬던 얄팍한 행태들도 결국 케이팝을 ‘이용’만 하려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 아니냐”고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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