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포탄 좀 얻자고…자신들이 만든 유엔헌장·NPT 뒤흔든다
유엔 체제 창설의 주역 국가가 유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범법 국가와 손잡았다. 백주대낮에 서로의 범죄행위를 돕기 위해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벌어진 참상을 반성하며 인류가 수십 년 간 견고히 지켜온 국제 안보 체계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13일 러시아 타스 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은 푸틴 대통령의 모든 결정을 지지한다. 북한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가 “성전”을 치르고 있다고도 표현했다.
어느 나라도 보인 적 없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전폭적 지지이자,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에 함께 맞서겠다는 다짐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미국과의 대리전으로 인식하는 러시아에 탄약이나 포탄 등 필요한 전쟁 물자를 지원하겠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한 발언이었다.
또 김정은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해 “북·러 관계를 최중대시하는 것이 (북한의) 확고한 입장”이라며 연대 의지를 드러냈다. 혈맹인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북한에 거리를 두는 사이 북한은 핵·미사일 고도화와 식량 문제를 해결해 줄 새로운 뒷배로 러시아를 염두에 둔 것이다.
푸틴 "北 지도자 로켓에 관심" 지원 시사
이는 미국을 향한 프로파간다 측면도 있다. 외교 소식통은 “러시아 입장에선 북한과의 협력이 강화될수록 유엔 등 국제사회에 거부권을 남발해야 하고, 식량과 생필품 등을 주기적으로 공급해줘야 하는 부담이 커지는 구조”라며 “그런데도 푸틴이 김정은을 초청한 건 무기 거래라는 표면적 이유 이외에도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러시아의 존재감을 알리고, 북한과의 군사협력이라는 극단적 행동까지 가능하다는 공포를 심어주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의기투합한 두 정상이 이심전심이라도 되는 듯 공개한 약속과 지지는 모두 국제 규범에 어긋나는 범법 행위다. 유엔헌장 1장 ‘목적과 원칙’의 2조 4항은 “다른 국가의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무력으로 위협하는 모든 행위를 삼가하도록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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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리 결의 보란 듯 무시 러시아
하지만 푸틴은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한 순간 이미 이를 어겼다. 유엔이 총회 투표를 통해 수차례 이를 규탄한 이유다. 그리고 이제 이런 ‘나쁜 짓’을 더 잘하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대상인 북한과 손을 잡았다.
2006년 10월 채택된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1718호 이후 모든 대북 결의는 북한의 무기 거래를 금지하고 있다. 러시아도 당시 결의에 찬성했다. 비탈리 추르킨 당시 주유엔 러시아 대사는 결의가 채택될 때 북한이 핵실험에 대한 안보리의 경고를 무시한 데 유감을 표하며 “우리 모두는 보기 드문 상황에 처해 있으며, 보기 드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랬던 러시아가 이제 대놓고 북한산 탄환과 포탄을 수급하려 북한의 지도자까지 초청했다. 특히 러시아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다. 안보리는 회원국들에 구속력을 갖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유엔 기관이다.
이는 단순히 대북 제재를 넘어서는 부정적 함의가 있다는 게 외교가의 우려다. 안보리의 제재를 받는 국가는 북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다른 제재 대상 국가나 제재를 지키지 않는 게 더 이득인 국가들은 김정은과 푸틴의 정상회담을 바라보며 ‘제재 따위는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라거나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도와주면 제재를 어겨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느냐”며 “그렇다면 국제 제재 체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걱정했다.
"유엔 제재 논의 준비" 무력화 우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북·러가 강도 높은 군사 협력 체제로 들어선다면 안전보장이사회 등 유엔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거나, 대화와 관여를 통한 비핵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며 “윤석열 정부가 추구하는 힘에 의한 평화와 제재·압박을 중심에 둔 대북정책이 한층 힘을 받고 강대강 대치 국면이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푸틴이 김정은이 원하는 핵 무력 관련 기술이나 핵잠수함 기술까지 이전한다면 이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도 볼 수 있다.
"민감한 분야에서 북·러 협력"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가능성이 있는 러시아의 대북 원전 건설 역시 현실화할 경우 사실상 무기로 개발할 수 있는 핵 물질을 북한에 제공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유엔과 NPT 체제 모두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옛 소련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정은과 푸틴이 범법 행위를 모의하는 형국은 더 모순적이다. 유엔 헌장 서문에 나오듯 유엔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뒤 “우리 일생 중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러시아를 포함한 상임이사국이 주축이 됐음은 물론이다.
NPT는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강대국들의 잇따른 핵실험으로 경각심이 높아지며 탄생했다. 1968년 제네바군축회의에서 공동으로 초안을 제출한 게 미국과 소련이었다. 그런데 푸틴은 당장 전쟁에 급한 포탄과 탄약을 얻기 위해 자국이 직접 ‘지분’을 보유한 국제안보 체계의 뿌리를 흔들려 하는 셈이다.
북·러 밀착을 통한 북한의 핵 무력 강화는 한·미·일 3국과의 선명한 대결 구도로 이어지며 동북아는 물론 국제사회 전체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도 크다. 푸틴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핵 추진 잠수함을 비롯한 핵 능력 고도화를 위한 첨단 기술까지 제공하는 건 북한의 미 본토 타격 능력을 완성에 가깝게 만든다는 뜻이다. 이에 대응하는 한·미·일의 안보 협력은 더 공고해지고, 결국 러시아가 북한을 이용해 미국과 대리전을 치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럴 경우 한국과 일본 등 역내의 핵 비보유국에 대한 안보 위협은 더 커진다.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김정은과 푸틴이 악수하는 장면이 동북아 ‘핵 도미노’의 방아쇠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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