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K기업가 정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도 물러가고 있다. 이번 여름은 7월 경남 진주에서 열린 ‘K-기업가정신 국제포럼’과 8월 부산 세계장애인대회에 조직위원장으로 참가하며 보냈다. 두 국제회의에서 외국 참석자들은 “한국이 언제부터 선진국이 됐느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경제성장과 선진화는 다르다. 대사로 7년간 해외 근무 후 귀국해 국내 여러 곳을 다니면서 “언제부터 이렇게 방방곡곡이 발전했지”라고 느끼는 것과 같은 맥락의 질문을 이들 외국인이 했던 것이다. 달라진 면모는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산업시설이나 관광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과 지방 소도시의 평범한 시민의 표정 속에서 발견된다. 외국을 여행하다 “아, 이 나라는 이래서 선진국이구나”하고 문득 깨닫던 것을 이제 외국인들이 대한민국에서 느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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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성장했다고 선진화는 아냐
기업의 경제·사회적 역할이 중요
정부·기업, 지구적 과제에 기여를
」
경제성장이 바로 선진화가 아니라는 것은 유엔이 정한 ‘지속 가능 발전’의 개념에도 반영돼 있다. 지속 가능 발전은 경제·사회·환경 차원을 포괄하는 발전을 뜻한다. 그중에 환경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니까 차치하더라도,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이 병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유엔은 1990년부터 건강·교육·복지 등을 반영한 ‘인간개발지수(HDI)’라는 사회발전 지표를 사용하고 있다. 즉, 국민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는 경제성장은 의미가 반감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30위 정도이지만, 인간개발지수는 20위 수준이다. 우리는 경제성장을 먼저 이뤘고 사회발전이 뒤를 따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를 내세운 국가는 복지를 포함한 사회발전을 먼저 추구했으나, 결국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경우가 많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국가 발전에는 국민·정부·기업이 모두 역할을 한다. 한국의 성장 단계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정부의 산업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민주화 이후 사회발전의 단계에서는 국민의 의식변화와 참여가 중요해졌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기업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자유시장 경제 체제인 한국에서 정부나 국민의 경제활동 대부분은 기업을 통해 이뤄지니까 기업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투자를 통해 부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제공해 국민의 소비가 가능하게 한다. 특히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의 특성상 수출을 통한 해외시장 진출도 중요하다. 한국이 아직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전에도 삼성·LG·현대 같은 기업 브랜드가 먼저 외국인들에게 알려졌다.
진주에서 열린 국제포럼은 ‘K-기업가 정신’에 관한 최초의 국제회의라는 의미가 있다. 한국의 초기 대기업 창설자들이 진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고, 그 지역에서 수백 년을 내려오는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의 실천적 유학 사상이 기업가 정신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됐다.
물론 쉽게 결론이 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 기업가 정신에 대해 진지하게 국제적 논의를 시작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사실 동아시아 국가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유교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며, 오랫동안 찬반 논의가 있었다. 흔히 기업가정신을 이야기할 때 도전 정신과 사회적 역할이 강조된다. 도전 정신은 위험 부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안전하게 입증된 길이 아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데 필수적이다. 한국의 발전 경험에 비춰 보면 특히 성장 단계에서 중요했다. 사회적 역할은 더 포괄적인 경제·사회 발전에 요구되는 기업가 정신이라 생각한다. 어떤 지역에 부동산을 미리 사둬서 큰돈을 번 경우에는 설령 위험 부담이 있었다 해도 기업가 정신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은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ESG 개념이 크고 작은 모든 기업에 화두가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특히 세계화 시대를 맞아 기후변화, 불평등, 인권 문제 같은 지구적 과제를 헤쳐 나가는 데 한국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100년 전의 창업 기업가 정신이 글로벌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업가 정신으로 재탄생하길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준 세이브더칠드런 이사장·전 유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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