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의 과학 산책] 포장이 없는 삶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현실은 아름답고 미래는 희망찼다. 깊은 커피 맛으로 유명한 학교 앞 카페에 갔다. 좋아했지만, 빠듯한 대학원생 월급에 자주 가지는 못하던 곳이다. 새로 배운 메뉴 ‘아이스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1년 정도 지나니 미국 생활에도 적응이 되었는지 가벼운 인사말이 직원을 향해 술술 나왔다.
입구와 도로 사이에는 계단이 있었다. 밖으로 내려가는 내 앞으로, 계단에 앉은 초췌한 남자가 종이컵을 슬쩍 내밀었다. 그 동네에는 노숙인이 흔했다. 하찮은 꽃이나 물건을 팔기도 하고, 아니면 앉아서 누군가의 적선을 기다리기도 했다. 약간의 선행으로 기분은 더 좋아질 듯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카페에서 생긴 잔돈 전부를 그 남자의 컵에 떨어뜨렸다.
그 순간, 소리가 이상했다. 동전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퐁당. 그리고 퍼지는 커피방울. 아뿔싸. 그는 계단에 앉아 청명한 가을 햇빛을 즐기고 있던 커피 애호가였다. 마음의 충격에 그 뒤의 기억은 흐릿하다. 화조차 내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그의 표정, 당황한 채 뱉어지던 나의 사과, 뒷걸음질 섞인 나의 발걸음 정도가 떠오른다. 감히 통성명하지 못했지만, 메고 있던 가방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대학 방문교수나 연구원이었던 것 같다.
나의 경솔함을 변명하자면, 사실 초라한 행색으로 비슷한 오해를 받은 수학자의 일화는 흔하다. 행인이 측은하게 던져 준 동전으로 주차한 수학자, 신발 정도는 신은 채 면담에 와 달라는 총장의 당부를 받은 수학자 등.(두 분 다 20세기 위상수학계의 영웅이다) 검소함 때문이 아니다. 겉치레라고는 약간의 여지도 통하지 않는 업종, 극도로 객관적인 학문에 오래 종사했기 때문이다. 과시나 호언장담은 어떠한 이점도 없다. 업적을 부풀려 둘러대는 눈속임은 언젠가 드러나기에 직업적 자살이라고도 불린다. 그런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포장이 없는 삶일 뿐이다.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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