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독재정권' '공산전체세력'...허상의 적 말고 비전 경쟁해야 [하헌기가 소리내다]
이념과 대안 없이 상대 공격만
합의 창출하는 정치 복원 절실
2020년 당시 한동훈 검사장은 ‘검언유착’ 의혹에 연루되어 휴대전화를 검찰에 압수 당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휴대전화를 포렌식하지 못했다. 비밀번호를 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은 ‘핸드폰 비밀번호 해제법’ 검토를 지시했다.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각계에서 추미애 장관에게 ‘인권의 가치도 모르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우리 현대사에서 보수 세력과 그 자장 안에 있던 권력기관들이야말로 ‘인권의 개념’을 모르는 세력이었다. 그들이 검찰, 경찰, 정보기관을 동원해 벌인 일들을 떠올려보라. 반대로 진보는 그런 세력과 투쟁하며 성장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이랬던 진보가 보수로부터 ‘인권도 모르냐’는 이야기나 듣고 있자니 실소가 나왔다. 어째 진보와 보수의 언어가 뒤집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2019년 11월, 탈북해 귀순 의사를 밝힌 어민 2명을 문재인 정부가 강제북송한 일로 보수 세력은 ‘반인도적ㆍ반인륜적 행위’라며 비난했다. 그 탈북 어민들은 조업 중인 오징어잡이 배에서 다수의 동료 선원을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혐의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문재인 정부를 비판할 수는 있다. 탈북자도 헌법상 우리 국민이고, 흉악범에게도 인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보수가 흉악범 인권을 그리도 중요하게 생각했던가. 한 여권 인사는 문재인 정부의 결정에 “그 어민들은 사형됐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갔을 것”이라면서 “비인간적인 짓”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최근엔 “가해자 인권만 중요하느냐”며 “흉악범에 한해서는 반드시 법대로 사형 집행을 하자”라고 말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또한 사형집행 시설 점검을 명령했다. 차라리 후자가 그간 내가 봐왔던 보수 세력의 태도에 더 부합한다.
도대체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일까.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국가의 정치적 지향점과 지향할 가치에서 중요한 게 이념이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어갈 철학이 이념”이라고 말했다. 동의한다. 통치세력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이끌어 나갈지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통치세력에게 방향성이 부재하면 그들을 견제해야 할 임무를 가진 야당에라도 있어야 한다. 권력이 국정운영을 그르치면 야당이라도 막아서 대한민국이 잘못된 경로로 이탈하지 않게 조타를 도와야 한다.
문제는 지금 대한민국엔 보수도 진보도 2023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관통할 수 있는 이념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저 진영 논리에 1980년대 이전에 사용하던 ‘철 지난’ 구호를 이념인 양 분칠하고 있을 뿐이다. 가령 자기 진영에 유리하면 진보가 ‘범죄 혐의를 받는 사람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강제로 풀자’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사실 군사독재정부에서나 떠올릴 발상이다. ‘수사에 협조시킨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겠다’란 얘기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12조는 불리한 진술을 강요 당하지 않을 권리를 담고 있다.
보수는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흉악범 탈북자 강제 북송 결정마저도 ‘반인권적’이라며 비난하다가, 대한민국 내의 흉악범죄가 증가하니 곧바로 ‘사형집행’을 운운하기 시작한다. 인권을 우선하겠다는 건가, 치안을 우선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흉악범 중에서도 탈북자에게만 예외적으로 인권을 강조하자는 건가. 일관된 기준이나 이념이 없고, 그 순간 진영의 정치적 유불리만 계산하니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어갈 철학이 이념’이라던 윤석열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맹종 세력,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 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다.” 그러니까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철저하게 투쟁하는 것이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2023년 대한민국을 ‘제대로 이끌어갈’ 철학이 담긴 이념이란 말인가.
2023년 대한민국엔 두 개의 선명한 진실이 있다. 첫째, 야권이 ‘검찰 독재 정권’이라고 비난하는 그 정부는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출범했다. 현 정부는 권력을 남용할지언정 결코 2023년의 대한민국을 ‘독재’할 수 없다. 지금의 여소야대 국면이 지속되는 한, 권력이 추진하고 싶어하는 그 어떠한 제도 변경도 그들 마음대로 추진할 수 없다. 그저 잠깐 위임 받은 권력을 향유하고 남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국민을 이롭게 하지 못했다면 지지율 하락으로 인해 레임덕이 오거나 선거를 통해 심판 받는다. 그런 권력은 ‘독재’가 아니다.
둘째, 대한민국의 어떤 원내 정당도 헌법 1조를 개정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 아닌,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공산전체주의’를 담지하는 체제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결코 집권할 수 없다. 집권은커녕 정당이 법원에 의해 해산될 수도 있다. 거의 모든 정치세력은 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집권 경쟁을 하려고 한다.
정치권이 ‘독재 정권’과 ‘공산전체주의 세력’이라는 허상의 적을 왜 만들어야 할까.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이념’도 ‘대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통치비전’과 ‘정책대안’으로 경쟁을 하는 대신 ‘국가 수호 투쟁’을 한다. 가령 ‘국가를 발전시킨다’ 대신 ‘나라를 지킨다’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북한(일본)에 바칠 세력이나 독재로부터 자기들이 지킨다는 식이다. 고로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적 정통성이 자기에게만 있다는 식이다.
2023년의 대한민국의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건 ‘독립투사’나 ‘반공전사’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열사’가 아니다. 밖으로는 혼탁한 국제정세에 정확히 균형을 잡아 국익을 추구할 수 있고, 안으로는 각종 사회갈등을 조율해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는 ‘정치’의 복원이 필요하다. 이야말로 한 해에 죽는 사람이 태어나는 사람보다 많은 이 사회를 다시 살만한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대한민국에는 과거 이념의 투사가 아니라 지금 시대의 문제를 풀 정치인이 필요하다.
하헌기 더불어민주당 전 상근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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