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보셨나요? 기내식 말고 해발 4000m 화산식 [세계여행 식탁일기]

김상희 2023. 9. 13.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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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구아 '불의 산' 푸에고 화산 분출을 보며 먹는, 세상 둘 도 없는 식사

여행지에서의 한 끼 식사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음식 한 접시는 현지인의 환경과 삶의 압축판이요 정체성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기자말>

[김상희 기자]

예정에도 없던 과테말라 안티구아(Antigua)에 왔다. 안티구아는 화산으로 둘러싸인 옛 수도. 스페인 식민도시 흔적이 남아있고 화산지대 커피콩으로 내린 스모키한 향의 커피로 알려진 곳이다. 안티구아는 쿠바행을 포기한 대신 얻은 대체 여행지다. 목적은 단 하나, 푸에고 화산(Volcan Fuego)을 보기 위해서다.  

좋은 공기는 몸이 먼저 알아보는 법이다. 온열 가려움도 어느새 사라졌고 배앓이도 바로 멈췄다. 덥고 습한 유카탄 공기에 보름을 고문당하다가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안티구아의 맑고 서늘한 공기 속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힐링됐다.

안티구아 센트로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는, 잘생긴 성층화산 아구아(Agua)산 외에도 안티구아에는 지금도 활발히 용암을 뿜어내는 화산이 있다. 이름도 그에 걸맞은 '불의 산' 푸에고 화산이다.

죽음의 등산이란 후기, 빈말이 아니었네

푸에고 옆의 휴화산 아카테낭고(Acatenango)에 올라 푸에고 화산의 분출을 보는 1박 2일 투어가 있다고 한다. 힘들다고 소문난 코스로 어떤 투어사는 55세 이상인 여행객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몇 년 전 과테말라 대학생 셋이 등반했다가 사망하는 사고까지 있었단다. 나는 산도 잘 못 타는 데다가 고산증까지 걱정됐다. 몇날며칠을 망설인 끝에 도전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젊으니까!'

아카테낭고 오르는 길은 해발 2500미터 지점부터 시작됐다. 등산로 초입부터 시커먼 화산재흙에 발이 푹푹 빠졌다. '죽음의 등산'이라는 후기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미끄럽고 가파른 화산흙 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삼십대로 보이는 서양 여행자들은 잘도 올랐다. 13명의 일행 중 최고령인 우리 부부가 한참 쳐져서 올라갔다. 몸이 괴로우니 저절로 초집중 상태가 돼 앞사람 발 뒤꿈치만 보고 발을 딛고 또 디뎠다.

출발할 때 투어사에서 나눠준 점심과 저녁, 간식 도시락을 각자 갖고 올라가야 했다. 자기 식량은 자기가 운반하는 방식이다. 산행 도중에 치킨샐러드를 점심으로 먹고 오르기를 반복했다. 힘들 때마다 주문처럼 되뇌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겠지.' 5시간쯤 올랐을까? 마침내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투어사에서 마련해 준 화산에서의 점심과 저녁 도시락
ⓒ 김상희
 
천막과 스티로폼으로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베이스캠프에 서니 푸에고산이 가깝게 보였다. 간헐적으로 폭발음을 내며 연기를 뿜어내는 화산이 지척이다. 죽을 것 같은 고된 등산 끝에 보는 푸에고 분출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푸에고화산은 지구의 숨구멍이다. 지구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김상희
아카테낭고산은 너무 추웠다. 겨울 패딩을 껴입고 모자에 목도리, 장갑까지 동원해도 추웠다. 가이드들이 지펴놓은 모닥불에 몸을 녹이다가 푸에고 화산 분출을 기다리다가 하는 일이 밤새 반복됐다.
어둠이 내리자 푸에고 화산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시뻘건 용암을 분수처럼 뿜어내더니 이내 산자락을 타고 흘렀다. 수초에 이르는 짧은 분출쇼였다. 30분 넘게 기다리면 한 번 정도 분출했다. 어떨 때는 약하게 어떨 때는 장엄하게. 낮에도 연기와 함께 흘러나왔을 용암이 어둠이 내려서야 사람 눈으로 식별된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어두울수록 잘 보이는 별처럼. 
 
 붉은 불꽃과 용암을 뿜어내는 밤의 푸에고. 산자락의 불빛은 푸에고화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 김상희
 
더러 화산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했다. 물고인 한라산 백록담도 봤고 백두산 천지에도 올랐다. 굉음을 내며 연기 뿜는 인도네시아의 브로모 화산과 칼데라호가 아름다운 필리핀의 피나투보 화산까지. 그래도 붉은 불꽃의 용암을 뿜는 화산은 내 생애 처음이다.

저녁은 스파게티였다. 가이드가 스파게티 도시락을 걷어 지펴놓은 모닥불로 한 솥에 볶은 후 다시 도시락에 나눠줬다. 해발 4000m 고지의 극한 추위에서 먹는 온기 있는 음식은 맛의 차원을 뛰어넘는 고귀한 생존 식량이었다.

아카테낭고 빵과 핫초코
 
 이튿날 아침 아카테낭고화산에서 바라본 아구아화산의 일출
ⓒ 김상희
화산 폭발음을 들으며 추위에 떨면서 눈을 붙였다. 이튿날 아침 식사로 오믈렛 빵을 하나씩 받았다. 각자 갖고 간 물을 한 컵씩 추렴해 끓인 후 한 잔씩 부어줘서 핫초코를 타 먹었다. 아구아화산의 일출과 푸에고 화산 분출을 동시에 보면서 먹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화산식, '아카테낭고 빵과 핫초코'였다.
 
 푸에고의 분출을 바라보며, 아카테낭고화산에서의 아침 식사
ⓒ 김상희
기내식이 비행기 안 해발 1만 m 고도에서의 식사라는데 내 발로 직접 걸어올라 해발 4000m 고도에서 화산 분출을 보며 먹는 조식이라니... 이 정도면 살아있는 지구에서 살아있는 나를 온몸으로 느낀 생애 최고의 식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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