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그래도 꿈은 있죠" [제주 이민 10년차들을 만나다]

박순우 2023. 9.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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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민 10년차들을 만나다]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는 일상예술가 최예지씨

‘제주 이주 열풍’이 분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지난 10년 동안 제주를 떠난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진짜 삶이 궁금해 직접 인터뷰에 나섰다. <기자말>

[박순우 기자]

제주도로 이주한 지 어느덧 10년이다 보니 섬 사람이 다 됐구나 싶을 때도 있지만, 여전히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여겨질 때도 많다. 남편도 나도 연고가 없었던 땅이기에, 여전히 육지의 문법대로 살아가며 섬 문화에 제대로 흡수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10년 전 제주로 온 사람들 중에는 혈혈단신으로 왔다가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제법 있다. 이주민들끼리 짝을 이룬 경우가 많지만, 간혹 제주도 사람과 결혼을 한 경우도 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일상예술가'로 살아가는 최예지(34)씨가 바로 그런 경우다.

예지씨는 나와는 달리, 제대로 섬 문화를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방인일 때의 제주와 정착민으로서의 제주는 어떻게 다를까. 사진작가인 남편과 함께 꾸려가는 스튜디오인 무르무이에서 둘째 아이를 임신한 예지씨와 마주 앉았다.

제주의 다른 계절도 살아보고 싶어서
 
▲ 그림 그리는 시간 최예지 씨가 첫째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최예지
 
- 십 년 전 제주에 어떻게 오셨는지가 먼저 궁금해요.
"갑자기 산티아고 가는 티켓이 생겨서, 인턴 자리를 뒤로 하고 순례길을 떠났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좀 막막할 때, 제안이 하나 들어왔어요. 산티아고 이야기를 엮어 <의외로 간단한 :)>이라는 책을 냈는데, 그걸 보신 분이 제주 동네 잡지를 만드는데 편집 일을 두 달 동안 해달라고 하셨죠.

얼마 안 되지만 월급도 있고 숙소도 잡아준다 해서 내려왔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과 계약이 다 돼있고, 라인업 구성도 끝났다고 했죠. 막상 내려왔는데 모두 거짓이더라고요. 아무것도 계약된 게 없었고, 다른 작가님의 그림을 똑같이 복제하라고 시켰어요.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대신 제 그림을 드렸더니, 동의 없이 무단으로 여러 제품을 만들더라고요. 제 이름을 뺀 채로 말이죠. 월급을 주고 있으니 그림은 자신의 소유라 주장하더라고요. 사실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 두 달이 너무나 힘들었어요."

- 오자마자 일종의 사기를 당한 거네요. 그런 일을 겪으면 당장 제주를 떠나고 싶었을 것 같은데, 십 년 가까이 사셨어요.
"계약이 끝나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인데, 그때 서울 집에 문제가 있어서 많이 시끄러웠어요. 집으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죠. 두 달 동안 겪은 일은 너무 힘들었지만 제주는 좋았어요.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았고요. 겨울 제주만 살아봐서, 봄이나 여름 같은 다른 계절도 살아보고 싶더라고요.

처음부터 제주에 정착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다른 계절만 살아보고 가야지. 올해 수국을 제대로 못 봤으니까, 내년 수국만 보고 가야지. 너무나 심플한 이유들이었죠. 뭔가 이뤄야지, 제대로 정착해야지, 이런 목표가 없어서 오히려 오래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착을 꼭 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왔던 친구들은 많이 떠났어요. 제대로 직장을 구해야 하고 집이 있어야 하고, 이런 마음이었던 친구들은 부담 때문인지 잘 정착하지 못하더라고요."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만들어진 정체성

-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데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면서 '일상예술가'라는 타이틀로 살고 있어요. 제주에서 일상예술가로 산다는 건 어떤 건가요?
"저는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그림뿐만 아니라 글 쓰는 거, 사진 찍는 거 모두 좋아하다 보니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군에 저를 넣는 게 좀 어색했어요. 저를 설명하는데 명사보다는 동사를 사용하고 싶었고요. 처음부터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 이런 꿈이 있어서 그림을 그린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흘러가다 보니까, 그림으로 돈도 벌게 되고 점점 큰 일을 맡게 됐어요. 처음에는 이웃분들이 명함이나 메뉴판 작업을 맡겨주셨고, 행사 포스터를 그리기도 했고,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출간하는 책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죠. 그냥 제주에서 살고 싶었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제 정체성이 만들어졌어요. 저도 참 신기해요."

- 정착을 목표하지 않았던 분이 4년 전에 제주도 남자와 결혼을 하셨어요. 제대로 정착하는 계기가 됐을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제주도 남자를 만나게 됐는데 그 점이 싫지 않았어요. 서울에 계시는 분들과 연애를 할 때도 있었는데, 저는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제주가 계속 좋아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제주에서 6년 동안 매해 이사를 다녔는데 그게 좀 지치기도 했어요. 둘이 연세를 반씩 부담하면 원룸보다 좀 더 큰 집에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그 무렵 처음으로 정착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저는 아기를 너무 낳고 싶었고 일도 하고 싶은데,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인 것도 좋았어요."

- 섬 시댁의 문화가 육지와 다르진 않았나요?
"많이 달라요. 신기했던 게 집안에 제사가 있으면 아버님 친구분들이 다 오세요. 제사에도 돈봉투가 오가더라고요. 결혼하고 아버님 친구분네 제사가 있다고 음식을 하러 오라는 거예요. 내가 거길 왜 가야 하지 싶었죠. 집안 제사가 있을 때도 아버님 친구분들이 많이 오시니까, 음식을 정말 많이 해야 돼요. 그게 처음엔 너무 억울했어요. 혈연, 지연, 학연이 정말 끈끈하더라고요.

저는 서울 태생이고 워낙 개인주의가 강한 곳에서 살았는데, 제주는 역사적으로 남자들이 워낙 귀하게 대접받는 땅이고 가부장제가 심하다 보니,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내 마음이 지옥인데 억지로 따라가는 것도 방법이 아닌 것 같았죠. 그들의 문화이기 때문에 일부는 수용해야 하지만, 심하게 선을 넘으려 하시면 그때는 제가 거부하기도 했어요. 당장은 힘들더라도 멀리 봤을 때는 이게 더 안정되고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제주도에 왔으면 제주도 법을 따라야지' 하셨지만, 저도 살아온 문화가 있다고 계속 어필을 했더니, 점점 이해해 주시더라고요. 좋은 점을 주로 생각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시부모님은 언제든지 아이를 봐주려 하시거든요. 적극적으로 육아를 도와주시고, 반찬도 해주시고. 이런 좋은 점이 있는 반면, 제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많이 비웠어요."
 
▲ 바다 물놀이 해질 무렵 제주 바다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최예지씨와 첫째 아이.
ⓒ 최예지
 
다시 선택하고 싶을 만큼 좋은 제주

- 이렇게 조율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겠네요. 첫째가 태어났고 뱃속에는 둘째가 자라고 있어요. 혼자일 때의 제주와 가정을 꾸린 지금의 제주는 좀 다를 것 같아요.
"혼자일 때는 늘 제가 이방인처럼 느껴졌어요. 집도 연세고 일도 어디에서든 할 수 있는 일이라, 실제로 언제든 떠날 수 있었죠. 지금은 남편도 여기가 집이고 아이도 있다 보니 무게감이 커졌어요. 교육에 크게 관심이 없기도 하고, 어린아이를 기르기에 좋은 환경이라 제주가 더 좋아지기도 했죠.

저는 육아 스트레스가 0에 가깝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육아에 있어서는 남편도 프리랜서고 저도 자유롭다 보니, 서로 조율만 하면 큰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키울 수 있어서 좋아요. 그래서 둘째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별로 없었어요.

아이가 커갈수록 교육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도 있다는데, 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요.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주에 와서 제가 변한 점은 미래를 크게 걱정하지 않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욕심이 많고 완벽주의 성향도 강해서 꼭 계획하고 실천했는데, 제주에 오면서 그런 게 완전히 무너졌어요."

- 쓰신 책과 SNS의 글들을 보면 '지금, 여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그 신념으로 계속 살고 있기 때문일까요?
"학창시절에 책 읽는 걸 무척 좋아했는데, 책에 보면 항상 '지금, 여기' 두 단어가 나오더라고요. 왜 작가들은 저 말을 강조할까, 늘 의문이었죠. 산티아고 갔을 때, 진짜 중요한 건 지금 여기라는 걸 체감했어요. 돌 하나만 잘못 밟아도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산티아고에서 지금 여기를 조금 인지하고 왔다면, 제주에서의 삶은 그걸 체득하는 시간이었어요.

섬 날씨만 봐도 태풍이 온다더니 해가 나고, 해가 난다더니 비가 오고. 일의 경우도 먹고살 수 있을까 하다가 갑자기 일이 들어와서 목돈이 생기기도 하고요. 한 친구는 우연한 기회에 의외의 재능을 발견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도 했어요. 이런 걸 보면서 예측할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싶었죠. 1~2년 전부터는 '지금 여기'라는 글자가 제 몸에 새겨진 느낌이 들더라고요.

'육아 스트레스가 왜 없지' 생각해 보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목표 자체가 없기 때문에 더 아이의 현재에 집중해서인 것 같아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서 지금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없어서, 그냥 지금 아이가 정말 예쁘게 느껴져요."

- 누구보다 순간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아요.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십 년 전으로 간다면, 다시 제주에 오실 것 같나요?
"다시 올 것 같아요. 서울을 자주 가는데, 가면 정말 눈이 돌아가요. 수십 층짜리 건물들이 많아서 하늘을 보려면 고개를 크게 뒤로 젖혀야 돼요. 반면에 제주는 어디서든 하늘이 넓게 보여서 좋아요.

반짝이는 것들도 참 많아요. 저는 그런 걸 소유하고 있지도 않지만, 가져야 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거든요. 그런데도 이런 데서 살다 보면 욕망이 안 생길 수 없겠다 싶어요. 제주는 다 비슷비슷하게 살아가고, 크게 더 가진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이런 환경적인 면에서 제주가 좋아요. 마음이 차분해져요."

예지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된다는 말이 실감났다. 한때 계획을 해야만 몸을 움직이던 사람이, 그 무엇도 계획하지 않고 주어진 순간의 삶에만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기에. 한 번 깨달은 걸 절대 잊지 않고 삶 속에서 묵묵히 실천하며, 결국 그 가치를 몸에 새긴 채 살아간다는 것. 자신을 깊이 사랑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계획이 없다 해서 꿈도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은 아이를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자신의 내면에 더 몰입할 수 있는 마흔 즈음이 되면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때까지 마음의 내공을 쌓으며 더 농익고 싶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그의 미래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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