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만에 병원 찾아간 모로코 국왕…생존자 "우릴 잊었다" 울분

박형수 2023. 9. 1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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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산맥의 산간 마을을 초토화한 강진에 늑장 대처해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에 직면한 모로코 국왕 무함마드 6세가 12일(현지시간) 주요 피해 지역인 남서부 도시 마라케시에 방문했다. 지진 발생 후 닷새 만에 이뤄진 이번 행보는 모로코 정부의 미숙한 대응에 국민적 분노가 커지는 가운데 이뤄졌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모로코 국왕 무함마드 6세가 지진으로 부상당한 소년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회복을 기원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모로코 국왕, 부상자에 입맞추고 헌혈


이날 모로코 국영 TV채널 알 아우울라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국왕의 마라케시 방문을 집중 보도했다. 국왕은 마라케시에 도착한 뒤 부상자들이 다수 입원해 있는 대학 병원을 찾아 한 시간 남짓 머물렀다. 매체는 국왕이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둘러보고 부상당한 소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회복을 기원하는 모습 등을 영상으로 공개했다.

이어 국왕은 병원 관계자를 만나 부상자의 건강 상태와 치료 상황 등을 문의한 뒤 소매를 걷고 헌혈을 했다. 인도 매체 더힌두는 “모로코 국왕은 특별한 경우에만 모습을 드러낸다”면서 “그의 헌혈 모습 공개는 놀라운 일”이라고 전했다. AP통신은 “지금 모로코에서 헌혈은 고통에 처한 지진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표시”라고 강조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국왕의 이번 병원 방문과 헌혈에 대해 모로코 정부의 늑장 대응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의식한 행보라고 지적했다. 이날 모로코 내무부는 지진 피해에 따른 사망자 수는 2901명, 부상자는 5530명이라고 집계했다. 모로코 정부 관계자는 이번 지진의 총 피해자가 최소 6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모로코 국왕(가운데)이 마라케시의 한 병원에서 헌혈을 준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살았는지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어"


이같은 대재난에도 정부 차원의 대책을 내놓지 않자, 당국이 지진 피해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생존자들은 “국가가 우리가 존재한단 사실조차 잊은 것 같다”고 한탄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산간 마을 두아르 트니르의 주민 파테마 베니자(32)는 “(지진으로) 모든 게 무너졌는데 우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면서 “춥고 배고프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 모로코와 스페인의 구조팀이 도착한 건 지진 발생 나흘째인 11일 오후 5시였다. 마을 사람들은 구조대에게 다가가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매몰된) 사람들을 살렸을 것 아니냐”며 화를 냈다.

골든타임이 지난 뒤에야 피해 지역에 들어온 구조대는 아직까지 생존자를 한 명도 구해내지 못하고 잔해 속에서 시신만 꺼내고 있다. WSJ은 가끔 발견되는 소수의 생존자들은 너무 깊숙이 매몰돼 있어 구조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전했다.

구조대 파견 지체에 대해 모로코 정부는 “피해 지역이 고도 3000피트(약 914m)가 넘는 고산 지대로, 산사태로 길까지 막혀 접근이 쉽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길이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며 “아이들도 땅을 파서 오고 간다. 외국에서 자원봉사자들도 들어와 우리를 도와줬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이어 “정부만 믿고 있었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12일(현지시간) 스페인 구조대가 모로코의 산간마을인 탈랏 니야쿠브에 도착했다. EPA=연합뉴스

주말에 비 예고 "피해지역 진흙탕 될 듯"


외신들은 생존자에 대한 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산간 지역에 접근한 헬기·트럭 등이 길거리에 밀가루·설탕·물 등을 무작위로 떨어뜨리고 있어 구호품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가족들이 덮을 담요를 구하고 싶다는 한 남자는 “내 몫의 구호품을 공정하게 배분받고 싶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날씨도 가혹해지고 있다. 늦가을에 접어든 모로코 산간 지역은 9월부터 눈이 자주 내린다. NYT는 “이번 주 후반에는 비가 예고됐고, 피해 지역을 거대한 진흙탕으로 만들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전했다. 산간 마을 탈랏 니야쿠브에서 집과 가족을 잃은 하야트 아이트 루친(24)은 구름이 낀 하늘을 가리키면서 “아직 텐트도 없는 데 너무 춥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12일(현지시간) 모로코 최악의 피해를 입은 알 하우즈주의 이재민들이 임시 대피소의 바닥에 잠들어 있다. AFP=연합뉴스


모로코 국왕은 이재민들을 위해 피난처를 제공하고 조속히 집을 재건하라고 명령한 상태다. 하지만 텐트조차 턱없이 부족해 이재민들 대다수가 길바닥에 담요를 깔고 노숙 중이다. 이번 지진으로 어머니와 딸을 모두 잃은 노르딘 아이브 블레신은 “이제서야 구조대가 음식과 옷을 가지고 들어왔지만, 우리는 집도 전기도 수돗물도 없다. 이곳에 집을 재건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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