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자연의 색을 보며 배우는 삶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편집자말>
[이수현 기자]
어렸을 적 아빠는 독일이나 미국으로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그때마다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를 선물로 사 오곤 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24색 크레파스밖에 몰랐던 시절, 독일제 60색 색연필 세트의 철제 뚜껑을 열어 색연필 특유의 나무냄새를 킁킁 맡았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60가지나 되는 색깔 중 유독 'sea green'이라든지 'rosewood' 같은 자연에서 따온 색이름들을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수많은 색깔 중 제일 좋아하는 색이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본 뒤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자연의 색'이다. 새파란 하늘 위에 피어오르는 하얀 뭉게구름, 50가지도 넘는 초록을 품고 있는 숲, 젖은 진갈색의 흙 위에 떨어진 깃털의 그라데이션, 왠지 심장을 동요하게 만드는 깊은 바다의 진한 파랑까지.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하던 대학생 시절에도 내가 역사적인 건물보다 공원에서 하늘을 보는 걸 더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원이 많은 런던에서는 관광지를 보러 가다가도 금세 공원으로 새서 하늘을 보며 누워있기 일쑤였고.
프라하나 베를린 같은 유적으로 가득한 도시에서도 잔디밭에 누워 있거나 높은 언덕에 올라가 해가 여러 색깔로 물들이는 하늘을 보았다. 유독 자연이 아름다운 스위스에서는 뿌연 안경을 깨끗하게 닦아서 다시 낀 것 같은 명료한 자연의 색감을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 경희궁 공원의 파란 하늘과 진초록과 갈색의 소나무 |
ⓒ 이수현 |
얼마 전 날씨가 너무 좋았던 9월의 금요일에 좋아하는 산책 장소인 경희궁 공원에서 점심 피크닉을 했다. 맑고 파란 하늘 아래 진초록과 갈색의 소나무, 연둣빛의 잔디 위에 하늘거리는 노란 들꽃.
솔솔 부는 바람과 새소리를 들으며 앉아있는 그 순간, 거짓말처럼 하얀 나비가 잔디 위를 팔랑거리며 지나가고, 까만 얼굴에 하얀색 턱시도를 입은 까치 한 쌍이 장난치듯 소나무 사이를 오간다.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다, 퇴근 후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잠드는 한 주를 보냈던지라, 왠지 찌들었던 오감이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자연의 색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편안함 때문이다. 형형색색의 콘텐츠로 눈을 괴롭히다 저 멀리 하늘을 보거나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면 눈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가다듬어진다.
물건을 사거나 인테리어를 할 때, 오랫동안 질리지 않는 조합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고민이 될 때는 역시 자연에 가까운 색을 선택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는 유독 나무색의 가구가 많다. 편안함은 본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결정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 먼저 옷을 갈아입은 단풍 |
ⓒ 이수현 |
자연은 종종 한결같음을 나타내는 은유로도 쓰이는데, 역설적이게도 한결같음을 의미하는 자연 속에서도 뭐든지 각자의 속도대로 물들어간다. 그 어떤 나무와 꽃도 똑같은 속도로 색깔을 바꾸거나 잎을 떨구지 않고 모두 저마다의 속도와 이치대로 살아간다.
조금 느리거나 빠르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이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파리를 떨어뜨리더라도 봄이 되면 연둣빛 새싹이 돋고 가을이 되면 그 잎이 붉게 물든다는 것을 안다.
큰 흐름 안에서 모두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고, 그런 모순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이 올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 같은 것이 생긴다. 엄마의 카톡 프로필이 꽃과 나무로 도배되는 것은 나이 들수록 각자의 시간 속에서 물들며 그곳에 존재함을 어여삐 여겨서인 것이 아닐까. 역시 엄마들은 지혜롭다.
가장 사랑하는 계절 가을이 오고 있다. 얼마 전 만난 9월 초에 먼저 색깔 옷을 갈아입은 나무처럼, 각자의 속도대로 물드는 가을의 과정을 찬찬히 지켜봐야지. 코스모스와 단풍과 청명한 가을 하늘의 색을 조언자 삼아, 조급해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대로 사는 법을 슬쩍 커닝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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