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 사고 ‘큰일 났다’ 했지만 새 세상 열려”…인빅터스 게임 은·동메달 수상자 이주은씨
“‘진짜 큰일났다’ 싶었죠. 그러나 내가 아니었으면 누군가가 밟았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건이 새 세상을 보는 기회가 됐어요.”
12일(현지시간) 독일 뒤셀도르프 메르쿠르 슈피엘 아레나에서 열린 세계 상이군인 체육대회 '2023 인빅터스 게임' 실내 조정 4분 경기 은메달과 1분 경기 동메달을 각각 하나씩 따낸 이주은(30)씨는 지뢰 사고를 당했을 때를 이처럼 회상했다.
2019년 8월 29일 경기 김포시에서 해병대 2사단 중위로 복무하던 이씨는 당시 쉬는 날 제초 작업을 자처하다 지뢰를 밟아 왼발을 잃었다. 소대장으로서 대원들의 작업량을 줄일 생각으로 밤샘 근무 후 홀로 갈대밭에 나간 게 화근이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상이군인을 위한 일에 종사하기 시작해 지금은 서울시 청년 부상 제대군인 원스톱상담창구에서 운영실장으로 근무하면서 요즘엔 관련 재단을 만드는 데 한창이다. 또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동료를 만나 조정 선수로 새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Q : 메달을 따고 주변 반응이 어땠나.
A : “한국에서 바로 재헌이(하재헌 육군 예비역 중사·2015년 비무장지대 북한 목함 지뢰 사건 부상 장병)로부터 연락이 왔다. ‘좀 더 세게 달렸으면 1등 했을 텐데’라고 아쉬워하더라.”
동갑내기인 하 중사와는 사고 후 인연을 맺게 됐다. 좌절하던 이씨는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찾아온 하 중사의 위로에 큰 힘을 얻고 금세 친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하 중사를 ‘은인’이라고 표현했다. 2021년 수상 조정을 시작한 것도 하 중사 덕분이었다.
Q : 상이군인과 관련한 일은 어떻게 시작했나.
A : “사고 전에는 상이군인에 대해 남들보다 더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재헌이 목함지뢰 일도 기사로만 접했지 자세히 알진 못했다. 두 다리를 잃고도 밝은 표정으로 찾아 온 재헌이를 만나고 나니 이전에 그 아픔을 공감하지 못했던 게 미안해지더라. 내가 다치고 나서야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보상은 물론 명예를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보상이라는 건 소수가 법이나 제도로 결심하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명예는 국민 인식 개선이 뒷받침돼야 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사고 후에도 군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고심 끝에 지난해 2월 대위로 전역했다. 해병대 사령관이 꿈이었다는 그는 “군인으로서 높은 계급은 나 외에도 할 수 있는 전우들이 많지만 상이 군인을 위해 법과 제도, 그리고 인식을 바꾸는 건 당사자로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2021년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뜻을 얘기해 부상 당한 제대군인을 위한 상담 센터를 만들 수 있게 됐다.
Q : 앞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나.
A : “상이군인을 돕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있다. 법인 이름은 ‘퍼플하트’, 미국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군인에게 주어지는 훈장 이름이다. 같은 해병대 출신인 여석주 전 국방부 정책실장의 아이디어로 시작해 김태성 전 해병대 사령관이 이사장을 맡아주시기로 했다.”
그의 법인 설립에는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씨는 대통령실 초청으로 하 중사를 비롯해 제2연평해전 승전의 주역인 이희완 해군 대령, 천안함 피격 사건 때 함장이었던 최원일 예비역 해군 대령과 참전 장병인 전준영 예비역 해군 병장, K9 자주포 폭발 부상 장병인 이찬호 예비역 육군 병장 등 8명의 상이 장병들과 해당 일정을 함께했다. 그는 이때 각종 행사에서 군인에 대한 예우가 당연시되는 미국 문화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과거 군 선배가 했던 얘기도 떠올랐다. 이씨는 “예전 한미연합사에서 근무할 때 미군 동료가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통보 받고도 덤덤한 게 신기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이제는 나라가 내 가족을 책임질 테니 오히려 잘 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한다”며 “이처럼 국가에 대한 희생과 헌신에 합당한 예우를 할 수 있도록 나 역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독일 뒤셀도르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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