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 없는 은퇴 생활... 5년을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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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주 기자]
명함은 사회에, 좀 더 엄밀하게는 시장에 '나'라는 상품을 내놓는 수단이다. 조직에 속해 있다면 조직의 이익을 위해 그 힘(직위나 업무)을 빌려 할 수 있는 능력을 드러내 보이게 한다. 자유직 종사자라면 스스로 능력자임을 내보이도록 한다.
나는 34년 동안 두 군데 직장에서 명함이 필요한 일을 했다. 은퇴한 후로는 명함이 없다. 나를 내세운 일을 더 이상 하고 있지 않아서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 먹을 것이 있다는 속담이 맞는지 어떤지 전문직에 종사했던 나는 은퇴 3년 차에 들어섰지만 거마비를 주는 회의나 행사에 가끔 초청되어 나가곤 한다.
▲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명함 없는 은퇴 생활을 택했지만, 지금 나는 만족한다. |
ⓒ 정승주 |
나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첫 기사 '요즈음 뭐하면서 지내세요? https://omn.kr/247mx'에서 은퇴 후 일하지 않는 이유를 돈벌이에 매이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라 썼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여러 현실적 고려와 함께 제법 긴 시간을 고민한 결과였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해보면 이유는 세 가지 정도다.
첫째, 조직에 얽매어 남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오랜 세월 몸 담은 직장을 사랑하고 맡은 일에 자긍심을 가졌지만, 조직과 사람으로 인한 아픔도 많았다. 직장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은퇴 후의 삶에서는 특히 사적 자아의 성숙도가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충만감과 안정감을 느낄 때 사적 자아는 성숙합니다. 만약 은퇴 전에 사적 자아를 잘 돌보고 키우지 않았다면, 은퇴 후에는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은퇴 전에는 공적 자아의 성장이 주무대이고 사적 자아의 성장은 부수적이었다면 은퇴 후에는 그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은퇴 후에 더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특히 가족관계가 그렇습니다." (이병남, <이병남의 보내지 못한 이메일: 은퇴 뒤의 삶(직장에서 나온 뒤 더 큰 세상을 만났다)>, 한겨레신문 연재칼럼, 2021.6.13)
이병남의 말처럼 남에게 주목받고 대접받고 싶어 직책이나 지위에 목매게 하는 '공적 자아'에 이끌린 삶이 아니라, '사적 자아'를 성숙시켜 내 기질이나 정체감에 맞는 삶을 살자는 의지 때문이었다.
둘째, 돈만을 위한 일은 그만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평소 자본을 경계하고 돈의 노예는 되지 말자는 어쭙잖은 소신 때문이기도 하다. 인생의 마지막 시기까지 돈 때문에 일을 하기에는 삶이 너무 아쉽지 않냐는 것이다. 좋아하는 걸 미루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보다는 하나라도 마음껏 해보다 마무리하는 게 현명할 것 같아서다.
셋째, 일로 소중한 인연을 맺은 동료와 선후배에 부담 주기 싫어서였다. 은퇴해서 명함 만드는 방법은 해왔던 같은 업역의 일을 계속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업역의 일을 찾는 것뿐이다. 전문직에 종사한 나에게 후자는 현실적이지 않다. 결국 해왔던 일을 계속해야 하는 방법만 남는데, 이 경우 대개 직장 동료나 같은 업역에 있는 선후배에 일터나 일거리를 의존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그것이 현역으로 있을 때 스스로 이룬 인적 네트워크 자산이라 했지만 은퇴한 사람이 하는 직·간접적 마케팅이 선후배에게는 부담스러운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하여 맥아더 장군이 퇴역할 때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 했다던데,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이렇게 세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모두 내 희망이거나 의지일 뿐이다. 하지만 명함 없는 은퇴 생활은 가상이 아닌 현실이다. 이루려면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아내는 은퇴하기 수년 전부터 은퇴 후를 고민하는 나에게 "정년까지 돈을 벌었는데 이후에도 돈 벌어오라 하면 그것은 절벽에서 미는 것과 같다"라며 다소 충격적인 어법으로 말하곤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겠지만 공감하고 지지하는구나 싶어 고맙고 든든했다. 명함 없는 은퇴 생활이 가능하게 된 건 어찌 보면 아내의 태도와 지원 덕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명함 없는 은퇴 생활을 선택하니 좋은 점이 제법 있다. 일단 조직이나 사람에서 오는 상처가 없다. 의무로 하는 일이나 이해로 얽힌 사람에 대한 부담이 작아지니 자유로움이 따라온다. 돈으로부터 멀어지니 소비가 적어 일상이 맑아진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게 해줬고, 그림을 그리게 해줬다. 무대보다 객석이 어울리는 내 위치를 잊지 않으면서 사회에 미약하나만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볼 마음도 생긴다. 그렇게 2년을 살아보니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자면 명함을 만들지 않겠다는 결정은 순전히 내 처지와 돈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괜찮다는 삶에 대한 태도에 따른 것이다. 내 선택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명토 박아둔다. 은퇴 후 삶의 선택지는 살아가는 인생만큼이나 많을 것이기에.
첨언 하나. 혹여라도 내 생각에 동의한다면 은퇴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조금 청빈(淸貧)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경제적 조건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 5년 정도 준비했다. 은퇴 전까지 몸을 누일 내 소유의 집과 빚이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필요 조건이다. 결혼했다면 배우자의 설득과 동의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거기에 삶의 태도를 바꾸고 실천만 하면 충분조건까지 갖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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