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작위'를 거절하다
[김삼웅 기자]
제국주의 국가나 독재자는 한 손에 칼을, 다른 손에 당근을 들고 반대·비판자를 처리한다. 권력이란 칼로 죽이고 감투나 돈으로 매수한다. 일제도 다르지 않았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의 '대한'을 빼고 『매일신보』로 바꾸어 총독부 기관지로 삼는 등 언론기관을 말살하고, 이완용 암살 미수사건의 이재명을 사형시키고, 서북학회를 비롯 각종 학술단체를 폐쇄시키고, 신민회를 해체하는 등 광란의 칼을 휘둘렀다.
한편으로는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을 공포하여 병탄에 공이 있거나 왕족, 구한국의 대신·고위관료 등 76명(4명 반납)에게 후작·백작·자작·남작 등의 작위를 주고, 전국의 유생 수천 명에게는 거액의 은사금을 살포했다. 민심을 달래고 여론을 회유하며, 반일주의자를 장차 친일파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미끼는 이종일에게도 던져졌다. "나도 작위 수여를 교섭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묵암 비망록』, 10월 20일자). 그는 개탄하였다. 한때 스승처럼 여겼던 이의 훼절이었다. "김윤식 같은 사람이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에 고개가 갸우뚱할 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민중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켜야 한다. 그 방법을 천도교회월보를 통해 전달할 수밖에 없다."(10월 31일자)
옥파는 나라를 도적질해간 그들로부터 작위를 주겠다는 말이 나온 것부터가 구역질 날 일이라면서 일축했다. 보기 좋게 거절당한 일본 정부도 만만하게 후퇴할 리 없었다.
그들은 이손 저손을 써가면서 옥파가 작위를 받을 것을 끈질기게 교섭해 왔다.
▲ 묵암 이종일 선생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어둡고 어지러운 시대였다. 순절하는 지사, 해외로 망명하는 지사도 많았다. 그리고 변절자도 많았다. 이종일은 살아남아서 동포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기회를 살피기로 했다. 때마침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내셔널리즘을 주장했다. 이종일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천도교 동지 홍병기·이종린·박경선·장효근 등과 내셔널리즘 즉 민족주의 운동을 협의했다. 모두들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 한다. 나는 "민족주의는 그 나라의 전통을 훼손치 않게 보존하려는 정치적 충성심의 발로"라고 설명하였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 같았다. 박명선은 "지금 그런 것을 실현한다면 당장 일본순사에게 체포되어 갈 것 아니오"라고 했다.
이에 나는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 데 그냥 놓아 두겠소. 물론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여야 할 것이오. 나라를 위하는 일에 어찌 개인의 생명을 돌보는 데 시간을 허비하겠소" 하니 장효근·홍병기 등은 "옳은 말씀이오, 옥파선생의 계획에 따릅시다" 하였다. 그러나 얼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역시 민족주의 운동은 힘든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도 중단없이 전진해야 할 것이다. 예전의 실학운동이나 그 사상을 행하고 전파할 때도 지금과 같이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실학운동의 재현으로 오늘날에는 개화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일으켜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주석 64)
주석
63> 김용호, 앞의 책, 20쪽.
64> 『묵암 비망록』, 1910년 11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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