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예술의 가치

이경원 2023. 9. 13. 04:1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정량 30g, 신선하게 보존, 1961년 5월 생산." 이탈리아의 피에로 만초니가 대변 30g씩을 90개의 깡통에 나눠 넣은 '예술가의 똥'이라는 작품이 있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혼맥지도' 책 3권을 1억6500만원에 사들인 김만배씨가 "예술적 작품으로 치면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예술가의 똥'이 떠올랐다.

'예술가의 똥'을 수억원으로 만든 건 '예술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열린 논쟁이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경원 이슈&탐사팀장


“정량 30g, 신선하게 보존, 1961년 5월 생산.” 이탈리아의 피에로 만초니가 대변 30g씩을 90개의 깡통에 나눠 넣은 ‘예술가의 똥’이라는 작품이 있다. 깡통 중 1개가 2016년 8월 밀라노 미술품 경매장에서 27만5000유로(약 3억8000만원)에 낙찰됐다. 말 그대로 똥이 수억원이 된 사례는 현대예술의 알쏭달쏭함을 논하는 교양이 돼 있다. 예술의 기호로부터의 해방, 미술품 시장에의 조롱 같은 어려운 말이 뒤따른다.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이들이 듣기엔 그저 헛웃음 나는 것도 사실이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혼맥지도’ 책 3권을 1억6500만원에 사들인 김만배씨가 “예술적 작품으로 치면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예술가의 똥’이 떠올랐다. 무례하게 책을 똥에 견주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현실 정서를 떠난 예술품의 가격을 생각해 봤다는 얘기다. 소분된 똥이 4억원이니 1억6500만원이란 책값은 합리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책엔 한국사회 최상위층 혼맥이 집대성된 정보 가치도 있다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곤혹스럽고 난해하다 해서 작품을 함부로 평가하면 교양 부족이다.

그가 말한 예술적 가치란 무엇이었을까. ‘예술가의 똥’과 ‘혼맥지도’는 누구나 실체에 접근할 수는 없다고 말해주는 작품 같다. 많은 이들은 만초니의 깡통 속에 실제 그의 똥이 들었는지, 다른 게 담겼는지,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지 궁금해했다. 그걸 알려면 돈을 내고 사서 열어봐야 할 텐데, 개봉하는 순간 예술 가치는 훼손되는 것이었다. 이 딜레마 속에서 사람들은 영영 만초니가 걸어온 개념미술 게임의 패자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깡통을 열어봤더니 또 작은 깡통이 나왔다는 이야기 정도가 전해질 뿐, 만초니의 깡통은 그의 사후 60년이 되도록 완전히 해부되지 않았다.

‘혼맥지도’ 또한 사람들을 고약한 틀 안에 가둔 것 같다. 책값의 많고 적음을 운운하려면 일단 그 내용을 알아야 할 텐데, 아무리 종이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권당 5500만원은 선뜻 지불하기 어려운 액수다. 시가를 형성한 당사자들이 억대 가치를 거듭 강조하니 어쩌면 금액 자체가 역설을 담은 예술적 장치인 건가 싶다. 재벌의 혼맥을 알려면 일단 재벌부터 되라거나, 최상위층의 부조리가 누구에게나 알려지진 않는다는 메시지인가 짐작해 보는 것이다.

예술적 가치를 말하는 건 자유겠으나 갖다 붙인다고 모두 미학인 건 아니다. 그저 알쏭달쏭한 것 같아도 현대예술엔 나름의 연유가 있고, 똥값과 책값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예술가의 똥’을 수억원으로 만든 건 ‘예술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열린 논쟁이었다. 가격은 경매장에서 매겨졌고 작품들은 미술관으로 갔다. 이번엔 반대로 아무도 모를 때 흥정이 이뤄졌고, 액수가 알려진 뒤에 예술적 가치가 강변되기 시작한다. 작품 발견 소식에도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이는 없다. ‘예술가의 똥’ 가격은 예술의 권위에 저항한 결과지만 ‘혼맥지도’ 가격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 건 예술의 권위뿐이다.

1000억원 재산을 길상사에 내놓고 “백석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말했다는 자야도 있고,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영국 역사학자도 있다. 후일 ‘혼맥지도’도 이 낭만적 찬사의 반열에 오를 것인지 아닌지, 안목 없는 기자는 금방 말할 수 없다. 다만 책 살 능력이 없는 이에게도 어렴풋한 인식은 있다. 모든 똥이 수억원에 팔리진 않는다는 것, 백석과 셰익스피어는 1000억원이나 인도를 가진 이만 읽은 예술이 아니라는 것 따위다. 혹시 검은 거래를 가리는 용도로 예술을 운운했다면 일단 오해나 무지가 자백된 것 아닌가 싶다.

이경원 이슈&탐사팀장 neosari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