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40대에도 어학 시험을 치는 이유
시험을 치는 동안 배우게 되는
삶의 엄중함·겸허함이 좋았다
이 지면을 통해 처음 밝히는데, 종종 영어 시험을 친다. 구체적으로는 텝스를 치른다. 여기까지 읽으면, 내게 구체적인 계획이 있을 거라 여길지 모르겠다. 한데, 나에게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14년 차 소설가인 내가 이제 와서 취직을 할 리 없고(될 리가 없다!), 유학을 갈 리도 없다(갈 돈도 없다!). 그렇다면, 인생 이모작 시대이니 어학 시험 비법을 공유하는 유튜버나 사설 강사 같은 걸 하려는 건가, 싶다면 그 역시 아니다. 시원하게 못 밝혀 미안하다.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나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두 달 전에도 마법에 걸린 듯 텝스를 치렀다. 한데, 텝스를 한 번이라도 쳐본 사람은 안다. 스스로 영어를 꽤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더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텝스는 영어 시험이면서 영어 시험이 아니라는 것을. 무슨 말일까. 당연히 텝스는 영어 시험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텝스는 영어 시험이라고 단정하기에 무리가 따르는 ‘시간 관리 테스트’다. 다른 이야기지만, 작가는 목격한 모든 사건의 향후 전개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듣기 영역을 칠 때라 해서 예외일 순 없다. 따라서 ‘그래, 보기 중 2번이 정답일 가능성이 49.9999…%, 3번일 가능성도 49.9999…%, 출제자가 문제를 잘못 냈을 가능성 또한 0.000…2% 정도…’라며 건설적인 고민을 시작하니, 스피커 속 성우는 이미 15번 문제 예문을 도주하듯 낭독하고 있다. ‘여보시오! 성우 양반! 나는 당신이 던진 12번 문제의 우주에서 미아가 돼 있단 말이오!’ 속으로 절규해도 성우는 비웃듯 17번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읽기 영역은 또 어떠한가. 여기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누구 못지않게 현명했던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상기해야 한다. ‘네 주제를 알라.’ 그렇다. 주제 파악이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한 난제다. 하여, 현인에게도 쉽지 않았을 주제 파악을 위해 범인인 나는 예문은 물론 문제와 보기까지도 꼼꼼히 읽었다. 첫 문제뿐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도…. 이렇듯 소크라테스도 달성 못 한 위업을 이루기 위해 몰두하면, 매번 감독관은 어김없이 비정한 대사를 전한다. “종료 5분 전입니다.” 이게 어찌 영어 시험이란 말인가! 시간 관리 테스트지. 아니다. 이건 성격 테스트다!
그렇기에 텝스 성적표를 받으면 매번 깨닫게 된다. 세상에는 넘을 게 아직도 많다는 것, 이 세상에 높은 것은 알프스와 히말라야뿐 아니라 뉴텝스 480점 고지가 있다는 것, 아울러 독자들의 기대는 더 높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한 설거지의 식기에 물방울 자국이 있나 없나 검사하는 아내의 기준은 이 모든 것보다 높다는 영구불변의 진리까지. 세상에 이토록 높은 게 많으니 나는 한없이 낮아진다. 게다가 고사실 의자는 왜 그리 낮고 딱딱한가. 한데, 중고등학생들은 온종일 그 낮고 딱딱한 자리에 앉아 미래를 그리고 꿈을 품는다. 또한 시험장은 절실한 눈빛으로 미리 자리에 와서 기도하고 심호흡하는 취준생과 입시생들로 빽빽하다. 그리하여, 텝스 시험을 치르면 언젠가 술에 취한 채 새벽 첫차를 탔을 때 느꼈던, 나를 제외한 온 우주의 성실함과 절실함이 나를 찔렀던 그 생생하고 날카로웠던 외침이 되살아난다. 한순간도 쉽게 살 수 없는 게 우리 삶이라고.
어쩌면 내가 원했던 건 텝스 고득점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학 시험이 알려주는 삶의 엄중함과 그 시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겸허함인지도 모르겠다. 40대 중반이 되니 무엇 하나 가르쳐주는 이가 없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텝스에 매진했던 동안 얻은 어학의 배움뿐 아니라 ‘시험을 치르는 동안 배웠던 것’이 소중해서 시험을 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히말라야보다 아득한 480점 고지를 넘고 싶다. 나는 세속적이니까. 그리고 인생에는 텝스 말고도 진짜 시험이 산맥처럼 빽빽이 둘러싸여 있으니까.
최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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