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확장” 헌신했는데… 남은 건 병든 몸·빚의 굴레
지난 7일 경기도 부천의 한 주택에서 만난 윤명신(가명·71) 선교사. 외관상 멀쩡한 그는 단기기억상실 치매 환자였다. 기자와의 인터뷰 약속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난 5월 아내를 떠나보낸 그는 아흔을 앞둔 노모, 30대 후반의 딸 지혜씨와 살고 있다. 지혜씨는 “1분 전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지인들과 약속을 잡으셔서 종종 문제가 생길 때가 있다”고 말했다.
명문 의대를 졸업한 윤 선교사는 의료선교에 대한 소명으로 좁은 길만 택했다. 의료봉사팀을 꾸려 국내외 오지를 찾아다니며 의료 혜택을 못 받는 이들을 고치고 싸매는 데 매진했다. 1988년 한 선교단체를 설립해 의료선교사 등을 키워냈다.
사역 기간 내내 윤 선교사 가정은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가 비일비재했다. 지혜씨는 “아버지가 선교단체를 운영하는 데 부족하다며 주택 보증금을 갖다 쓰셔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윤 선교사는 3년 전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중환자실 생활을 하다 회복됐지만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장기요양 5등급 판정을 받았다.
반평생 선교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는 노후까지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국민연금은 가입 기간이 길지 않다 보니 실수령액은 미미한 반면 갚아야 할 빚은 상당하다. 모친상을 치른 뒤 지난 4개월간 몸과 마음을 추스른 지혜씨는 생계를 위해 취업 전선에 나설 예정이다.
윤 선교사의 사례는 한국 선교계의 씁쓸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보내는 선교’에 혼신의 힘을 쏟은 반면 사역을 마무리하는 선교사들의 은퇴를 위한 법·제도적 장치와 복지에는 소홀했다는 점이다. 1세대 선교사들의 은퇴가 본격화됐지만 이를 대비한 교단·교회·선교단체·선교사 차원의 준비는 미미한 편이다.
20년간 동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사역하다 6년 전 아내의 암 발병으로 귀국한 최윤호(가명·70) 선교사는 ‘은퇴 아닌 은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최 선교사의 아내는 2년7개월간의 투병 끝에 2019년 하나님 품에 안겼다. 이듬해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선교지로 돌아갈 길이 계속 막혔다. 최 선교사는 치매를 앓는 노모를 간호하며 서울의 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후원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최 선교사의 한 달 수입은 정부로부터 받는 기초연금(32만원 수준)과 몇몇 이어지는 후원금까지 합쳐 50만원 안팎이다. 최 선교사는 “선교사들이 은퇴하면 거의 최저 생활자로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원자들이 (제가) 한국에 오래 머무는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해외에서 활발하게 사역하는 이들로 후원 대상을 바꾸는 일이 많은 것 같다”며 말끝을 흐렸다.
최근 부산에서 만난 이명재(가명·73) 선교사도 준비 안 된 생계형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대기업을 다니다 선교사로 헌신한 그는 지난 24년간 동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복음전파 사역을 이어왔다. 들쭉날쭉한 후원금으로 사역하기에도 부족했기에 노후 준비는 언감생심이었다.
은퇴 후 그의 한 달 수입은 기초연금 25만원과 지역의 노인일자리기관에서 받는 27만원까지 더하면 50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생활비 충당을 위해 이 선교사 아내도 요양보호사로 근근이 일하고 있다. 이 선교사는 “사실 제일 염려되는 부분은 건강이다. 아프면 그나마 노인일자리기관에서 일하며 받는 급여마저 못 받게 되니까”라고 말했다.
한국선교연구원(KRIM)이 발표한 ‘2022 한국선교현황 통계조사’에 따르면 장기선교사의 고령화로 은퇴 대상자는 늘고 있지만 실제 매년 은퇴하는 선교사는 그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그래픽 참조). 장기선교사의 연령 분포에서 은퇴 시점인 70세 이상은 3.4%로 조사됐는데, 이 중 은퇴선교사 비율은 0.91%(202명)로 3분의 1 수준이다. 은퇴 시기에 봉착했지만 어떤 이유로든 제때 사역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은퇴 후 사역을 지속하는 선교사는 꾸준히 늘었다. 은퇴선교사를 대상으로 한 사역 지속 여부에 관해서는 10명 중 6명 가까이(58.8%)가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답했다.
홍현철 KRIM 원장은 12일 “평생 사역한 곳에서 선교사 정체성으로 이어가길 바라는 분들이 은퇴 후에도 선교지에 남는다”며 “이와 더불어 중요한 요인으로 한국에서 주거지, 기초생활 등 노후 준비가 안 되면 은퇴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홍 원장은 “파송교회나 선교단체는 선교사 파송 단계부터 은퇴 기간을 염두에 두고 재정을 설계하며 협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선교사가 여러 사정으로 한국에 왔을 때 문화 충격을 딛고 잘 적응하도록 다리 역할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천·부산=글·사진 김아영 이현성 조승현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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