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시선] 갚을 땐 50년, 빌려줄 땐 40년
은행은 억울하다. 다른 건 몰라도 ‘반백년 대출’ 상품인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주담대) 관련해서는 그렇다. 가계 빚 증가의 주범을 찾아 나선 금융당국의 레이더망에 제대로 걸려 철퇴를 맞고 있지만, 사실 ‘50년 만기 주담대’는 태생부터 지분의 상당 부분이 정책 당국에 있다.
금융당국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반백년 대출’ 상품이 윤곽을 드러낸 건 지난해 5월이다. 정부가 발표한 ‘긴급 민생안정 10대 프로젝트’ 보도자료에 관련 내용이 담겼다. ‘청년층과 신혼부부 대상 50년 만기 초장기 모기지를 그해 8월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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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달간 5조, 50년 만기 주담대
“가계대출 증가 주범” 철퇴 맞아
당국의 ‘꼼수’에 대출자만 혼란
」
더 황당한 건 금융당국이 50년 만기 주담대에 대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우회수단”이라고 맹폭을 가하며 강도 높은 현장 조사를 벌이겠다고 나선 것이다. 민생안정 프로젝트 발표 한 달 뒤인 지난해 6월 금융당국이 발표한 ‘새정부 가계대출 관리방향 및 단계적 규제 정상화방안’을 보면 황당함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금리상승 시 취약차주 보호를 위해 초장기(50년) 정책 모기지 도입 방안을 밝혔다. “보금자리론과 적격대출 최장 만기를 현행 40년에서 50년으로 확대한다”고 했다. 이 방안에서 금융당국이 밝힌 50년 만기 모기지 도입의 목적은 ‘대출 한도 확대’다. 최장 만기 확대로 인한 효과로 “원리금 상환부담은 줄고 최대 대출가능금액은 늘어난다”고 친절하게 예시까지 제공했다.
‘50년간 빚만 갚냐’는 비아냥에도 당시 금융당국이 초장기 대출 상품을 내놓은 건, DSR 규제에 발이 묶인 젊은층의 대출액을 늘려주기 위해서였다. DSR은 소득에서 빚 상환액(원금+이자)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DSR 규제를 적용하면 소득과 대출 유무에 따라 대출 한도가 정해진다. 소득이 작거나 대출이 있는 저소득층의 대출 한도가 줄어든다. 고소득층을 위한 규제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만기를 늘리면 DSR이 낮아지며 대출 한도를 높일 수 있다. 50년 만기 대출은 ‘DSR 우회수단’이 맞다. 그것도 은행이나 대출자가 아닌, 금융당국이 기획한 방안이다.
시중은행이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을 내놓은 건 지난 7월이다. 지난 1월 정책금융상품인 특례보금자리론이 나오고 수협은행이 관련 상품을 내놓은 뒤 한참 뒤다. 오히려 은행들이 뭉그적댔다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금리 상승기 취약 대출자(차주)의 원리금 상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분위기에 발맞춰 상품을 내놨고,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해당 대출 상품이 시중에 나온 지 두 달여 만에 대출액이 5조원가량 불었다. 가계대출 증가를 ‘반백년 대출’이 주도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대출받으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50년 만기 대출이 합리적 선택이다. 만기가 길어지면서 은행에 줘야 하는 돈이 많아진다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잘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해당 상품의 도입 목적(?)에 맞게 50년 만기 주담대는 짧은 만기 상품보다 대출 한도를 높일 수 있다. 한 푼이라도 아쉬운 마당에 돈을 조금 더 빌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기가 길다 보니 은행에 줘야 하는 이자 등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그것도 일부는 맞고 일부는 다르다. 실제로 대다수의 주담대는 상환 기간이 3년 정도 지나면 전체 대출기관과 무관하게 중도상환수수료 등을 내지 않고 돈을 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주담대를 받은 사람들의 평균 대출 상환 기간은 7년 정도라는 게 금융권의 추정이다. 만기(50년) 한참 전에 상환이 마무리된다. ‘반백년 대출’이라는 무게가 무력해지고, DSR 규제라는 높은 대출 관문을 돌아갈 길이 열렸으니 딱히 가지 않을 이유는 없는 셈이다.
늘어나는 가계 빚에 좌불안석인 금융당국은 모르쇠에 남 탓을 하며 은근한 으름장을 놓는 중이다. 감독 당국은 50년 만기 주담대 관련 DSR 적정 여부에 대한 현장 점검을 계획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당국의 기세에 일부 은행이 50년 만기 주담대 판매를 중단하거나 연령 제한을 두자, 당국발 ‘절판 마케팅’에 막차를 타려는 수요가 몰리며 대출은 더 늘었다. 지난단 30일에는 은행 대출 담당 임원을 모아서 회의하며 “50년 주담대의 만기는 유지하되, DSR 산정 시 만기를 40년으로 간주해달라”는 구두 지침까지 전달했다. 돈을 갚을 때는 50년 기준으로 하지만, 빌려줄 때는 40년 기준을 적용해 실제 대출액을 줄이라는 이야기다. ‘꼼수’인지 ‘묘수’인지 모를 주문에, 은행은 억울하고 대출자는 혼란스럽다.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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