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이 은폐한 반국가성향...반미 안 먹히자 반일로 우회한다 [민경우가 소리내다]

민경우 2023. 9. 1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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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민주화운동은 한 몸
급진주의 전통 현실에 큰 영향
50대가 된 1980년대 운동권 세력이 지금도 주체사상 같은 청년 시절의 사상과 정서를 바탕으로 활동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8ㆍ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목소리 높였다. 사실상 반국가세력으로 진보민주세력을 겨냥한 것이다.

전례 없이 강경한 기조 때문에 많은 논란과 파란이 일었다. 무엇보다 반국가세력을 소수의 간첩ㆍ친북세력을 넘어 진보민주세력 상당수로 확장하고, 마치 그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어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대통령의 발언에 공감하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어느 정도 그렇다. 아마도 진보민주세력 다수도 본인을 반국가세력으로 지칭하는 데 강한 저항감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대통령의 주장에 어느 정도, 아니 상당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괴리가 생겨난 배경은 진보민주세력의 반국가적 성향이 주로 무의식에 은폐되어 본인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이 창설 60주년을 맞아 지난 4일 원훈(院訓)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이 원훈석의 글씨체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간 복역한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체'인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다. [사진 국정원]

신영복 글씨체로 된 원훈석이 얼마 전까지 국가정보원 한복판에 있었다. 한국 지하당의 상징인 통일혁명당(통혁당)에 가담한 사람의 글씨체로 만들어진 원훈석이 그를 검거하는 것이 주 임무인 국정원에 한동안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신영복의 실체를 형식적으로 인지하면서도 내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90년대 학생운동은 양면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주체사상이나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신봉하는 하나의 측면과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또 하나의 측면인데, 불행히도 양자는 상호 연관되어 있었다. 북한은 집요하게 대남 방송을 통해 대중운동의 온건화를 설득하고 있었고, 당시 학생운동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학생운동이 6월 민주화운동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주사파가 학생운동을 석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주사파라는 급진적 성향과 민주주의에 기여했던 역사적 공적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정상적이라면 80년대 학생운동에서 주사파적 기원과 영향을 지우고 새로운 민주주의로 재정립했어야 한다. 그러나 운동권 다수는 학생운동에서 주사파적 기원을 제거하지 않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내재해 있던 급진적인 유산을 그대로 남겼다. 이를 위해 은폐와 무의식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이다. 북한 해주에서 송출했던 한민전 방송은 녹취 후 소책자로 배포되어 80년대 후반~90년대 학생운동을 휩쓸었다. 한민전 방송이 중요한 것은 학생운동의 북한 기원과 영향을 숨길 수 없는 명료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학생운동권, 나아가 학생사회 전체는 수십 년에 걸쳐 한민전을 역사 속에서 지웠다. 거대한 역사 왜곡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사람의 인식은 유기체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한민전을 지워내면 나머지를 통해 온전한 민주주의가 정립될 것처럼 착각했지만 한민전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와 연결되어 있던 찌꺼기들도 제거해야 했다. 그 찌꺼기들은 독소처럼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직접민주주의, 반외세친북, 민중과 평등의 과도한 강조, 공안 기관에 대한 지나친 적대감 등이 그러하다.

80년대 학생들은 혁명을 지향했다. 그들은 정치인ㆍ교수ㆍ종교인으로 성장했지만 그들의 무의식 속에는 80년대 나라를 통째로 뒤엎고자 하는 위험한 사조가 흐르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올해 핵심 쟁점 중 하나인 반일이다. 운동권 급진주의의 핵심은 반미였다. 그러나 반미는 대중적으로 잘 통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반미로 가는 다양한 우회로를 개척했는데 그중 하나가 역사이고 다른 하나가 일본이다.

김일성의 교시에 갓끈 전술이라는 것이 있다. 갓의 두 갈래 끈 중 하나를 끊으면 갓이 벗겨진다는 내용이다. 즉 반미가 어려운 조건에서 반일을 통해 갓의 일본 경로를 끊으면 결국 한·미·일 삼각동맹이 와해되면서 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반일 운동의 뿌리가 그러하다. 야권은 한미일 협력의 약한 고리인 일본 문제를 공략했다. 물론 반일 운동의 시원은 다양하고 그 규모도 훨씬 크다. 그럼에도 반일 운동의 경로 중 하나가 80~90년대 반미 운동의 우회로를 열고자 했던 운동권 급진주의·주사파에 있음은 명백하다.

반국가적 성향과 문화의 잔재는 그저 머릿속에 유제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질기게 살아남아 현실 정치에 영향을 준다. 더 위험한 것은 80~90년대 급진주의의 전성기에 태동한 반국가적 유산들이 여전히 중년 세대를 중심으로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다. 반국가세력을 정치·조직적 수준에서 암약하는 간첩세력으로 한정하는 것은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과거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민주화운동 동지회를 만들었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 자산을 주사파가 사취해 독점 이용하는 어이없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 우리가 만든 쓰레기는 우리가 치우기 위해서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새로운 잔치판을 열 수 있다.

민경우 대안연대 상임대표, 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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