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케 살아남은 무명 작품들의 전시형 수장고
전시장에 공사판처럼 비계가 설치돼 있다. 가장 돈을 적게 들여 만든 것처럼 거칠기 짝이 없는 선반에는 캔버스에 그려진 회화, 큼지막한 조각 등 얹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장에는 레일이, 바닥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 이리 저리 회전하며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이 신기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바라칸컨템포러리 갤러리에서 이주요(52) 개인전 ‘백 개의 카트와 그 위에’를 개최 중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연자방아 돌리듯 온힘을 다해 그걸 돌리면서 뭔가를 보여주려고 애썼다. 도대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선반 위에 놓인 작품들은 자신의 것도 있지만 거의 모두가 동료 선후배의 작품 아닌가.
이번 전시는 그에게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여하는 ‘올해의 작가상’ 영광을 안겨준 미술작품 창고 시스템 ‘러브 유어 디포’ 연작의 연장선에 있다. 바퀴를 달고 레일을 설치함으로써 과거에 비해 미술작품 창고 자체가 한 바퀴 돌면서 작품들을 쇼하듯 보여주는 방식으로 더 진화했다. 그는 회화도, 조각도, 미디어 아트도 아닌 ‘개방형 수장고’ 콘셉트로 한국 중진 작가들이 꿈꾸는 최고의 영광을 거머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출발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주요는 한국인 최초로 네덜란드 라익스아카데미 레지던시에 입주했다. 2년 기간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와야 하는 상황. 운송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그는 작품을 버리기 위해 종류별로 5개의 카트에 담았다. 러시아 작가의 제안으로 이별의 세리머니를 하듯이 카트를 끌고 레지던시 공간을 도는 영상을 찍었다. 부슬부슬 비가 와서 더 슬펐던 날이었다. 영상으로 기록된 퍼포먼스는 ‘5개의 카트와 그 위에’라는 작품이 됐다. 이번 전시는 33세 그 시절의 열정과 불안에 대한 헌정 같다. 카트에 담겼던 작품은 버려질 운명을 피하고 국내에서 전시되며 용케 살아남았다.
하지만 모든 작가의 작품들이 용케 살아남는 운을 만나는 건 아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4명 후보에 선정되기 2년 전이었다. 그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예술가 매칭 멘토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첫 질문이 ‘어떻게 그리냐’가 아니었어요. ‘어디다 보관하느냐’였어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10여 년 전 라익스아카데미에서의 장례식장 같았던 풍경이 소환됐다. 조소과를 나온 그 젊은 작가는 “전시가 끝나고 나면 버리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작품을 톱으로 잘게 썰어 생활쓰레기 봉투에 넣어 담는다. 이런 걸 10번만 더 하면 마음이 아파서 작가로 더는 못살 거 같다”고 하소연했다. 그때 이주요는 선배인 내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전시를 하며 지켰다. 물론 그 조소과 나온 후배 작가의 작품도 타워형 보관창고에 높이 올려졌다. 이주요는 작품 보관 창고가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막 만들었을 때는 몰라요. 몇 년이 지나야 그 작품이 내 작가 인생에서 중요한 거 였구나 판단이 들며 버릴 작품, 남길 작품 구분이 되거든요. 그래서 아카이브가 중요합니다. 판단이 설 때까지 버리는 시간을 유예해주는 시스템을 사회적으로 마련하는 것, 그것이 제 목표입니다.”
미술품 창고 프로젝트는 공공미술로도 선보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코로나 시기 작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진행한 프로젝트에 선정이 돼 2021년 11월부터 서울 수서 SRT역 인근 궁마을 공원에 공공미술 작품이 설치됐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폐쇄형 창고라 밖에서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만든 창고가 천천히 돌아가도록 했다.
이주요는 어떤 작품이 창고 안에 들어갈지 선정한다는 점에서 작가이자 큐레이터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시 담론은 빠져요. 오히려 창고 저장 논리가 작동되지요. 무거운 건 아래로, 가벼운 건 위로 올리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주요는 미술품 창고에 작품을 수장할 때 미학적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중요한 판단을 유예해주는 것이므로, 5년 후 어떤 작품으로 평가받을지 모를 그 환한 미래를 지켜주는 미술계의 ‘수호천사’로도 족한 표정이었다. 전시에서는 ‘타자기’ ‘미확인 발광체’ ‘한강에 누워’ 등 이주요의 다른 대표작들도 함께 볼 수 있다. 10월 27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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