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은 원주민의 삶을 위협했나... 정말로?
[윤일희 기자]
책 <라 프론테라>는 급박하고 상징적인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다. 미디어 등에서 눈길을 끌었던 이 사진은 한 번 본 이들이라면 잊기 어려운 장면이다.
미-멕시코 국경지역에서 '미 국경수비대가 쏜 최루탄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도망가는 라틴계 여성과 어린 두 딸의 모습(맨발에 기저귀를 찬)'이 찍힌 로이터통신 김경훈 기자의 사진이다.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 2019년 1월 4일 한 여성이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와 멕시코 티후아나 사이의 국경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 연합뉴스/AP |
지금의 미-멕시코 국경이 생긴 것은 미-멕시코 전쟁(1846~1848)의 결과였다. 전쟁에 진 멕시코는 상당한 땅(당시 멕시코 땅의 반)을 미국에 양도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미국의 중서부와 서부 지역인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텍사스, 캔자스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의 국경은 삼엄함으로 인식되지만, 1848년 미국으로 양도된 지역에 살던 이들에게는 "미국이 된 멕시코"일뿐이었다. 살던 곳을 떠나지 않은 이들은 멕시코계 미국인의 선조가 됐다.
이처럼 미-멕시코 국경은 미국의 멕시코인에게도 멕시코 땅의 멕시코인에게도 오랫동안 큰 어려움 없이 오고 가던 곳이었다(미국인의 월경도 다반사였다). 국경 이쪽저쪽에 서로의 가족이 살고 있기도 하고, 미국 쪽의 생필품이 멕시코보다 싸기 때문에 쇼핑을 위해 국경을 드나드는 멕시코인의 통행도 잦았다. 한동안 미국 도시 엘페소는 멕시코인들의 생필품 소비로 소매업 특수가 이어지기도 했다.
부흥 그리고 쇠락
지금의 미국은 금융이나 빅테크 기업들로 연상되지만 19세기 미국은 농업 국가였다. 미국의 밀 옥수수 등 대규모 농사를 위해서는 현지 미국인들의 노동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미국의 농장주들에게 낮은 임금으로 더 오래 부릴 수 있는 멕시코 노동자들은 환영받았다. 면화를 따기 위해 착취된 흑인 노예들보다 멕시코 농업 노동자 수가 현저히 많았다.
1941년 시작된 '브라세로 프로그램'으로 수많은 멕시코인이 미국에 유입됐다. 하지만 이들을 고용한 고용주들은 더 싼값에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해 불법 이주노동자를 더 선호하게 됐고, 이들은 (비)자발적으로 불법 이주자의 처지로 내몰렸다. '불법 이주자'의 시작이었다.
농업 노동으로 시작된 멕시코인의 저임금 노동은 미-멕시코 국경 지역에 산업지구가 급속히 확산되며 공장노동자로 전환되게 된다. 국경지역의 관세 면제를 기반으로 조성된 산업 지역은 '마킬라도라'로 불리며 호황을 누리다 중국의 출현으로 쇠락하게 된다.
쇠락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이곳에서 일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뜻이다. 실업은 빈곤으로 이어지고 빈곤한 삶을 파고드는 폭력의 고리는 이 지역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런 위험이 멕시코 하면 떠올리게 되는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위험한 나라라는 인상을 가지게 한 이유였다.
처음부터 미-멕시코 국경이 마약 유통의 진원지였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과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들을 '마약 테러리스트'로 지정함으로써 군사작전을 벌여 대대적인 소탕에 나선다. 미국으로 마약 입항이 막힌 마약 카르텔이 미-멕시코 국경을 통과하는 민간인들을 마약 운송책으로 이용해 우회 진입을 시도하게 되면서 미-멕시코 국경이 새로운 폭력 중심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전 세계 마약의 대부분은 북미와 유럽에서 소비되지만 생산은 남미 등 개발도상국에서 맡고 있다. 즉 선진국 특히 미국에 마약을 공급하기 위해 가난한 나라의 노동력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커피를 재배하던 가난한 남미의 농부들은 조금이라도 나은 수입을 얻기 위해 코카인을 재배하고 있다. 빈곤을 착취하는 국가 간 권력관계는 마약을 통해서도 철저히 불균형하게 배치되고 있다.
그렇다면 '마약과의 전쟁'은 정말 마약을 퇴치하기 위해서였을까? 권력자는 늘 권력을 유지할 수단이 필요하다. 나쁜 통치자는 공포를 이용해 국민들의 심리를 위협한다. 마약 공급을 눈 감아왔던 미국의 권력자들이 갑자기 마약과의 전쟁에 나선 것은 "국가 안보를 위협할 새로운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대두되고 있는 공산주의의 망령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책 <라 프론테라> 표지. |
ⓒ 앨피 |
미-멕시코 국경이 이처럼 살벌한 곳이 된 데에는 '마약과의 전쟁'이 큰 몫을 했지만, 이곳을 더욱 확실하게 공포의 지역으로 매조지게 한 것은 트럼프의 등장이었다. 트럼프는 대통령 후보자 때부터 '아메리칸 퍼스트(American First)'를 내세워 백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표밭을 관리하기 위해 백인들의 박탈감을 더욱 부추겼다. 이민자나 이주노동자를 '불법자'로 감시하고, 국경으로 유입하는 이주민을 막기 위해 국경 순찰대에 즉시 강제 추방권을 부여해 대대적이고 폭압적인 추방정책을 강화한다. 저자가 이 책을 시작하며 소개한 라틴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는 사진이 나오게 된 배경이 무자비한 국경 봉쇄 및 추방 정책에 기인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이민자나 이주민에 대한 혐오는 뿌리 깊다. 멕시코인들은 이주자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해왔기 때문에 '치카노' 혹은 '치카나'로 불리며 조롱당해왔다. 지금은 주로 '라티노'로 퉁쳐 남미 이주민들을 호명하지만, 이들 내부에는 출신 국가별 알력 관계가 상당하다. '라티노'는 검은 피부, 검은 머리, 짙은 눈썹, 커다란 엉덩이로 형상화된다. 육체적 특징만 도드라지게 만들어 지적으로는 열등하다는 편견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이주민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한국에서도 유사하게 작동한다. 한때 폭력 영화에서 잔인한 범죄자들은 죄다 조선족들로 채워지지 않았던가. 예멘 난민에 대한 가공할 소문도 한국 사회가 이주민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혐오 조장과 몰이성
저자는 '라티노 혐오론'에 이르러서, 정말로 '라티노'들이 백인의 삶을 위협했는가를 짚어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미국 백인의 삶의 질을 저하시킨 건 "미국이 주도한 세계 경제 구조 변화 때문"이지 이주민 때문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미국은 싼 노동력을 구해 세계로 공장을 이전시키며 노동자가 일할 곳을 없앴다. 그리고 이주민들을 더 낮은 임금으로 내 몬 것은 앞서 말했듯 고용주의 탐욕이지 노동자 탓이 아니다.
이는 지금 한국 노동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마음이 바뀐 미국이 자국의 제조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재촉하고 나서자, 한국 반도체나 이차전지 기업이 미국에 속속 공장을 짓고 있다. 한국의 제조업 실업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또한 지금 한국의 저임금 노동 시장은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돼 있다. 이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지 아득하지만, 이들에 대한 처우나 시선은 혐오와 차별이 난무한다.
그러나 '라티노 혐오론'에도 불구하고 의미심장한 반전은 진행되고 있다. 미국 선거판에 "라티노 표를 얻지 못하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로 유권자의 약 14%를 차지하는 라티노들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트럼프 패배 후 '라티노 혐오론'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끝이 아니다. 트럼프의 재등판이 예고돼 있고, 갈라치기로 표를 얻으려는 정치가의 비틀린 야망은 결코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판도 위태롭다. 이념 갈라치기로 민심을 선동해 표를 얻으려는 몰이성이 심각하게 펼쳐지고 있다. 세계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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