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익선동 어느 세탁소 이야기

조영준 2023. 9. 1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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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303] 제15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상영작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

[조영준 기자]

 다큐멘터리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 스틸컷
ⓒ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지하철 종로3가역 4번 출구. 출구를 나와 도로 하나만 건너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또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 아닌 듯, 오래된 가옥을 개조해 들어서기 시작한 수많은 식당과 카페가 줄을 잇는 곳. 바로 익선동이다. 지금처럼 번화하기 전만 하더라도 이 동네는 1920년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도시형 한옥 110여 채가 모여 있는, 북촌과 서촌에 이어 서울의 도심에 남은 마지막 한옥마을이었다.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을 시작한 것은 2010년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이미 개발이 시작되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 이곳 익선동을 주목하게 만들었고,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이 연이어 촬영되면서 알려지게 된다.

다큐멘터리 <어쩌면 더 아름다웠을 IkSeoundong 166>은 그런 익선동 한 편에 자리하고 있던 어느 세탁소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 작품이 촬영되던 2016년은 밀려드는 자본으로 인해 익선동 전체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겪기 시작하던 때다. 새로 유입되는 문화로 인해 원주민들이 자리를 빼앗기게 되는 아픔으로부터 이곳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익선동의 상가 임대료는 250만 원 선에서 450만 원 선으로 1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올랐다는 기록이 있으며, 2023년 현재까지도 성수동, 용리단길, 을지로 상권보다 높다는 이야기가 있다.

02.
"임대료 때문에 그래요."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166-68번지. 세탁소의 주인인 이춘우 사장님은 지금 자리에서 18년, 바로 건너 자리에서 5년, 이 골목에서만 23년을 보냈다.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게 된 세월이다. 본가는 20분 거리인 연신내 인근이지만 골목에서 보낸 오랜 시간은 그를 익선동의 원주민 속에 녹아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 돌아오는 주말이 지나고 나면 그 시간도 멈추게 될 것이다.

문제는 임대료다. 언젠가부터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는 젊은 사장들의 식당과 카페에 밀려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사장님의 세탁소 문제만은 아니다. 옆 골목에는 벌써 인테리어 공사가 시작된 집들도 여럿이다. 그나마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사정이 나은 편. 세탁소 사장님은 자신의 새로운 자리를 마련할 시간도 없이 내쫓기게 생겼다. 마지막 다림질을 하는 사장님의 어깨 너머로 텔레비전에서는 국가 주도로 시행되는 공공주택에 대한 소식이 뉴스로 흘러나오고 있지만, 이 골목에까지 그 손길이 닿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03.
마음 속에는 억울함보다 아쉬움이 더 크게 자리한다. 이는 떠나는 세탁소를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골목의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유리창 한 켠에 붙어있는 폐점 안내문을 등뒤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괜히 발걸음을 서성이는 고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그중에는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세탁과 수선물을 맡기러 온 손님들도 있다. 그런 손님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는 모르지만 대개 멀리서부터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이다.

마지막까지 남는 사장님의 걱정은 아직 찾아가지 않은 세탁물을 이 공간이 완전히 문을 닫기 전까지 되돌려 주는 일이다. 이제까지는 공간이 협소하기는 해도 오래 찾아가지 않은 세탁물을 보관해 줄 장소가 있었지만, 이제는 이 공간 전부가 사라지게 되는 탓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마음 든다.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찾아줬던 이들의 기대에 더 보답하지 못해서다.

04.
하나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여러 사람의 마음을 담아내고 싶어서였을까? 이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정현정 감독은 외부의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한으로 유지한다. 필요없이 컷을 많이 나누지도 않고, 골목을 다니는 일반인들의 모습도 제한하지 않고, 심지어는 카메라의 움직임조차 거의 없다. 그저 세탁소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듯한 태도다. 캐리어를 끌고 프레임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외국인들, 화려하게 차려입은 젊은 사람들의 모습은 잠깐이나마 우리가 익선동의 주민이 되어 외부인을 바라보게 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차라리 구역 전체가 재개발되는 상황이라면 과거에 존재했던 이들의 시간이 모두 함께 멈추면서 자취를 감추는 공간의 존재감이 더 두드려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전체의 모습은 변함이 없는데 이렇게 하나둘 자리만 사라지다 보니 골목의 흔적에 가려 작은 자리의 소멸이 더욱 쉽게 잊히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세탁소 역시 같은 자리에 다른 화려한 매장이 들어서고 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금방 모습을 감추고 말 것이다.

삶은 기쁨과 슬픔이 반반씩이라고 했었나. 원래의 자리를 빼앗기고 떠나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옛 정취와 현재의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의 농도만큼이나 아쉬움과 헛헛함의 감정이 무겁게 남아있다. 떠나는 사람도 떠나 보내는 사람도 한 공간의 마지막을 다소 무력한 모습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05.
여러 동네를 지나며 반복되어 온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여기 익선동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임계점에 다다랐을 이 동네의 인기가 한풀 꺾이고 나면, 다음 동네를 찾게 될 것이고, 또 그 다음 동네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마다 사라지는 공간을 기억도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익선동 166번지의 세탁소를 다시 문 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동네의 세탁소는 지역의 개발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도 함께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더 아름다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작품의 모두와도 같은 이춘우 사장님의 익선동 세탁소는 2016년 5월 4일을 마지막으로 23년의 영업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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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제15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온라인 상영작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라인 상영작은 오는 9월 17일(일)까지 네이버TV에서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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