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대의 은퇴일기㉞] 올여름 최고의 피서지로 안내한 ‘아침가리13’

데스크 2023. 9. 1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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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탈출하는 자동차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대부분 학교나 직장인도 더위를 피해 방학을 하거나 휴가를 떠나는 시기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둘레길과 옥빛의 개울물이 경쾌하게 흐르는 계곡에는 무더운 여름이라는 말이 없어 보인다. 시원한 바람이 반기고 자연의 소리가 가득한 곳은 마치 천국의 한 조각인 것 같다. 자연과 하나 되는 소중한 시간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듬뿍 안고 돌아왔다.

이슬을 머금은 야생화

연일 찌는 듯한 불볕더위로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안전문자가 수시로 날아온다. 무더위로 인해 일주일에 한 번씩 다니던 사진 촬영 수업도 방학이다. 몇 주를 쉬다 보니 갑갑증이 나서 관광버스를 타고 계곡으로 번개 출사를 떠났다. 폭염경보가 쉼 없이 날아와 감히 엄두를 못 내는지 희망자가 겨우 여섯 명뿐이다. 오전 7시 반 잠실역에서 ‘아침가리13’이라고 적힌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는 간단한 일정 소개에 이어 아침 식사로 따뜻한 떡 한 덩어리와 물 한 병을 준다. 평소에 시루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오늘따라 입에 착 붙는다. 여행 가며 먹는 것이라 그런가.

우리 일행이 타고가는 ‘아침가리13’이라는 푯말을 단 버스ⓒ

버스 여행은 예전에도 몇 번 다녀왔었다. 코로나 발생 이전에는 스티로폼 상자에 따뜻한 찰밥을 담아와서 큰 접시에 반찬과 함께 담아 지그재그로 뒤로 전달한다.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기내식에 빗대어 일명 '스내식'이라고 하는데 맛있게 먹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 이후에는 좀 더 간편한 떡으로 바뀐 것이다. 식사와 교통편을 제공해 주고 별로 비싸지 않은 비용으로 가고 싶은 곳을 편하게 여행할 수 있어서 가끔 이용한다.

높은 구름이 두둥실 터 있는 청명한 하늘ⓒ

평일이라 차량이 지체되지는 않지만, 꼬리를 물고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달린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인제양양터널을 지나 서양양 IC에서 내려 인제군에 있는 양수발전소 상부댐인 진동호로 올라간다. 도로 옆 개울에는 마셔도 될 시원한 청정수가 철철 흘러내린다. 윗옷을 훌러덩 벗고 뛰어들거나 등목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다. 푸른 물감을 칠해놓은 높다란 하늘에는 몽골 초원에서 봤던 흰 구름만 두둥실 떠 있다. 산비탈 밭에는 고랭지 채소들이 자라고, 길가의 아름드리 홍송(紅松)이 줄지어 달려온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첩첩산중이다. 고갯길을 굽이굽이 올라가자 버스가 구름 속으로 빨려든다. 귀가 먹먹하다. ‘높고 험하여 새가 하루에 넘지 못하고 잠을 자고 넘었다’라는 조침령(鳥寢嶺) 터널을 지나서도 꼬부랑 고갯길을 한참 달린다. 어지럼증으로 멀미가 나려 한다.

안개가 자욱한 둘레길을 걸어가는 동호회원들ⓒ

해발 940미터에 있는 상부댐인 진동호 주차장에 내려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풀잎에 맺힌 물방울이 끝부분에서 달랑거린다. 습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들어 피부에 닿자 땀은커녕 차가운 냉동고에 들어온 것 같다. 몇 사람 앞의 일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고, 매미의 합창만 조용한 산속에 울려 퍼진다. 자주색의 이름 모를 들꽃은 이슬을 머금은 채 신선한 향기를 내뿜는다. 초롱이 꽃 아래에 간신히 매달린 이슬과 거미줄에 걸쳐있는 물방울을 카메라에 담는다. 진동호는 안개로 뒤덮여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내려올 때쯤 돼서야 숲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자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펼쳐진다. 꼬마도 엄마·아빠 손 잡고 씩씩하게 걷고, 팔순 지난 할머니도 친구와 동행한다. 그 연세에 단체여행객에 끼여서 계곡 산행을 오신 열정이 존경스럽다. 십여 년 후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저런 용기를 낼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부럽다.

주민들이 직접 기른 갖가지 채소로 만든 맛있는 반찬ⓒ

진동마을 폐교를 리모델링한 농산촌체험학교에 점심을 준비해 두었다. 긴 테이블에 밥과 국을 비롯하여 반찬이 8가지나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다. 두부와 김치전, 호박전, 취나물무침, 명이나물김치, 멸치고추복음, 고추된장무침, 명이나물절임과 된장국이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채소로 만들었단다. 정갈하고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반찬 하나하나를 보자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앞사람의 반찬 담는 속도가 왜 저리 느리게 느껴지는지. 모든 반찬이 신선한 채소와 양념에 주민들의 정성이 깃들어 있어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최고의 맛이다. 아주머니는 명이나물김치에 두부를 싸 먹어보란다. 맛을 표현할 글을 찾지 못하겠다. 시원한 곰취 막걸리를 한잔 곁들이자 더는 부러울 것이 없다. 다음에 점심만 먹으러 한 번 더 오고 싶다. 환상적인 식사를 한 것만으로도 오늘 여행의 모든 것을 만족하고도 남는다. 복도로 나오자 주민들이 직접 길러 만든 장아찌, 산나물, 옥수수, 약초 술과 각종 발효액이 진열되어 있다.

아침가리 계곡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는 동호회원ⓒ

커피 한잔 마신 다음 내린천을 건너려 하자 이름과 연락처를 기록하란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있을지 모를 것에 대비하기 위한 것 같다. 방태산 기슭에 있는 아침가리계곡으로 접어들었다. 아침에 잠시 밭을 갈 정도의 해만 비치고 금세 져버릴 만큼 첩첩산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정감록에서 “난을 피해 편히 살 수 있는 곳”이라 알려진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전쟁이 끝난 다음에 난리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정도로 그 심산유곡의 깊이를 가름할 만하다.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지난 폭우로 길이 끊어져 갈 수가 없다. 다시 돌아 나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개울을 첨벙거리며 건넌다. 개울 가장자리의 얕은 곳이나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 물 흐르는 소리가 우렁차 옆 사람과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원한 개울과 숲길을 걸으니 한여름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아침가리 계곡물에서 피서를 즐기는 작가와 일행ⓒ

넓고 평평한 개울이 나타나 좀 쉬어가기로 했다. 배낭을 벗어 놓고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개울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풀썩 주저앉는다. 옷을 입은 채 개울물에 텀벙 들어가는 것도 어릴 때 동무들과 해 본 후 처음이 아닌가. 물장구를 치고, 돌로 수제비를 뜨고, 물속에서 수영하며 모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다. 마을로 내려가는 사이 젖은 옷이 다 마른다며 전혀 개의치 않는다. 환갑이 지난 할배와 할매들은 거리낌이 없다. 어릴 때 발가벗고 시골 웅덩이에 줄지어 뛰어들던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옥빛의 물속에는 산천어도 함께 흥겨워한다. 같이 간 자매는 “언제 이렇게 천진스럽게 놀아 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너무 즐겁고 시원했다”라고 한다. 아마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더위를 아침가리계곡에 모두 던져 버리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가평휴게소에서 잠깐 내렸더니 화기가 얼굴로 확 다가온다. 계곡에 두고 온 것으로 알았던 불볕더위가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절기가 바뀌어 제풀에 꺾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출사를 떠났지만 사진 촬영은 뒷전으로 미룬 채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물놀이한 것만으로도 올여름 최고의 피서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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