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경고 중요치 않다"...무기 급한 러, 유엔 대북제재도 흔드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결국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 만회를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러시아를 찾았던 4년 전과 달리 이번에 더 급한 쪽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 보인다.
‘무기 공급자’ 배려한 러시아 내 동선
지난 10일 오후께 전용열차 편으로 평양을 출발한 김정은은 12일 새벽 북ㆍ러 접경인 하산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ㆍ러는 구체적 동선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일본 언론들은 러시아 지역 당국자 등을 인용해 “하산에서 환영 행사도 열렸다”고 보도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도 12일 브리핑에서 “오늘(12일) 새벽 김정은이 전용 열차 편으로 러시아 내로 들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김정은의 러시아 도착 사실을 확인했다.
하산에 도착한 김정은은 북·러 간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하산역 인근 ‘조선ㆍ러시아 우호의 집’에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2019년 첫 방러 때와 같은 동선이다. ‘김일성의 집’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1986년 김일성의 소련 방문을 앞두고 세워졌으며, 러시아는 지난 4월 이 곳을 리모델링했다.
현재까지는 정상회담 장소로 동방경제포럼(EEF)이 열리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학이 거론된다. 크렘린궁이 이미 “정상회담과 공식 정상만찬” 등을 예고한 가운데 3.1km의 루스키 대교가 유일한 진입로인 루스키섬에 위치한 극동연방대학교는 사실상 요새에 버금갈 정도의 보안을 갖추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4년 전 김정은의 방문 때는 김정은이 이동하는 모든 동선의 차량 이동을 통제했고, 양 정상을 보호하기 위해 대학 건물에 저격수를 배치하기도 했다.
4년 전과 달라진 구도
전문가들 사이에선 지금까지 나타난 김정은의 러시아 입국 과정은 4년 전과 유사하지만, 앞으로 러시아에서의 행보는 4년 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ㆍ러는 지난 11일 김정은의 방러 사실을 동시에 공개하면서 이번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이 “푸틴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이뤄졌다”고 밝혔다. 정상외교에서 누가 초청했는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푸틴이 초청했다는 건 러시아가 김정은으로부터 얻어내야 할 시급한 사안이 있다는 의미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전쟁 물자는 제 때 공급이 안 될 경우 전쟁의 수행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극도의 시급성이 필요하다”며 “강력한 국제 제재를 받고 있는 푸틴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정상 간 담판을 통해서만 결정할 수 있는 김정은과의 무기협상이 매우 절실하다”고 말했다. “4년 전 ‘하노이 노딜’ 이후 김정은이 푸틴을 찾아가 만났던 때와 비교하면 소위 ‘갑을(甲乙) 관계’가 달라진 상황”이라면서다.
2019년 2월 60시간동안 열차를 타고 베트남 하노이로 이동해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뒤 ‘빈손’으로 돌아갔던 김정은은 두 달 뒤인 그해 4월 푸틴을 찾아갔다.
김정은은 당시 회담을 마친 뒤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이 일방적이며 비선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최근 조선반도와 지역정세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며 미국을 비난했다. 그러나 정작 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것은 이미 동력이 다떨어진 6자 회담 재개 정도였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2박3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던 김정은과 방러 이틀째인 4월 25일 정상회담을 한 뒤 곧장 ‘일대일로 포럼’ 참석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김정은은 러시아 태평양함대 사령부 등을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 홀로 남겨지자 마지막 3일차 일정을 대폭 축소하고 사실상 또다시 ‘빈손’으로 북한으로 돌아갔다.
‘무기 제공’ 맞춤형 정상회담 가능성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전문가들은 전쟁 물자 지원을 대가로 러시아의 첨단무기 기술 습득을 바라는 김정은이 인근 태평양함대사령부 방문을 비롯해, 러시아 내 동선을 확장해 하바롭스크주, 아무르주 등 극동의 다른 지역까지 방문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아무르주에는 북한이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는 군사위성 기술 등이 집약된 보스토치니 우주기지가 있다.
경우에 따라 정상회담 장소도 무기 거래라는 회담의 목적에 맞춰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
크렘린궁은 12일 “북ㆍ러 정상회담이 극동에서 수일 내에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회담 장소가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닐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는 말이다. 이미 하산을 통과한 김정은 역시 목적지를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 하바롭스크 등으로 변경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이렇게 될 경우 김정은의 추가 이동 시간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상회담 시기는 13일 또는 EEF가 완전히 종료된 이후 시점인 14일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
“북한과 대북 제재 논의 준비”
크렘린궁은 특히 이날 “미국의 ‘무기거래 경고’는 중요하지 않다”며 이번 정상회담의 목적이 북한으로부터의 전쟁 무기 공급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또 “필요시 북한과 대북 유엔 제재 논의도 준비돼 있다”고 밝혔다. 무기 제공의 대가로 러시아가 안보리 차원의 대북 제재 무력화 내지는 완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김정은 ‘벤츠’ 실은 北여객기 도착
한편 이날 항로추적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24’에 따르면 북한 고려항공 소속 편명 JS621이 오전 6시 57분 평양 순앙국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이륙했다.
등록 번호 P-671인 해당 항공기는 2013년 고려항공이 도입한 우크라이나 안토노프사의 AN-148 기종으로, 김정은의 북한 내 시찰에 활용됐다. 항공기에는 정상회담을 위한 북측 지원 인력과 물자가 실려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9년 북ㆍ러 정상회담 때도 동원됐던 김정은의 ‘방탄 벤츠’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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