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순수함이 우리를 가둘 수도 있음을
전용준 2023. 9. 12. 12:42
[리뷰] 영화
<이노센트>이노센트>
[전용준 기자]
▲ 영화 <이노센트> 포스터.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순수. 단어를 구성하는 한자부터 순수할 순(純)에 순수할 수(粹)일 정도로, 우리는 이 단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투명하고 깨끗한, 그리고 왠지 지켜주어야만 할 듯한 순박한 대상에게 우리는 이 수식어를 붙여준다. 티 없이 맑게 웃는 아이에게서 순수함을 찾으며, 그가 세상의 벽에 부딪히는 모습에 씁쓸함과 안쓰러움을 느낀다. 어른이 된 우리는 이곳저곳 때 묻었기 때문일까. 이따금 사람들은 잃어버린 순수함에 과히 높은 가치를 두고는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직관은 순수함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을까. 흔히 순수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불순은 악하고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많은 불순물이 없다면 세상은 필시 무질서로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스템의 일부가 되며, 원하든 원치 않든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때문에 성장 과정 속 타자와의 교감이 중요시되고, 이를 통해 배우는 수많은 이물들, 다양한 가치관과 사회 규범들이 인간을 사람답게 만들어준다.
▲ 영화 <이노센트> 스틸컷.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말하자면 사회화는 일종의 이염 현상이다. 오직 나의 색만 칠해왔던 스케치북에 한 면 한 면 다른 이들을 물들여감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일원으로 거듭난다. 어쩌면 아무에게도 영향받지 않고 단 하나의 이물질도 허락하지 않은 채 자신의 순수함만을 고집하는 쪽이 더 깨끗할 수도 있으리라. 무정하고 무지하며 방약무인할지언정 일단은 순수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배려는커녕 타인을 고려조차 하지 않는 이기적 순수함까지도 우리가 지켜주어야 하는 걸까.
영화 <이노센트>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며, 상당히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노르웨이의 한 아파트 단지를 무대로 한 이 사고실험은 일견 순수한 악과 순수한 선의 대결처럼 보인다. 힘을 휘두르는 벤자민(샘 아쉬라프)은 악이요, 그를 막으려는 아이샤(미나 야스민 브렘세스 아샤임)와 안나(알바 브륀스모 람스타드)는 선이 되리라. 실제로 작중 벤자민의 행적을 되짚어보면 그를 악하다고 부를 수밖에 없기에, 선악으로 나뉘는 진영 구도는 감독의 의도와 상통할 테다.
▲ 영화 <이노센트> 스틸컷.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만일 영화가 그저 순수한 아이들에게도 선악이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지고 있는 초능력 배틀 콘텐츠와 큰 차이를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서로 대립하는 저들 대신, 홀로 초능력을 갖지 못한 이다(라켈 레노라 플뢰툼)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그러고는 마치 선악의 잣대를 잠시 거두라는 듯, 저들의 해맑은 순수함을 지켜보라는 듯, 그의 곁에 다른 누구도 아닌 벤자민을 위치시켰다.
이다와 벤자민은 함께 어울리며 지렁이를 밟아 죽이고, 개미집을 무너트리며, 고양이를 계단 밑으로 떨어트렸다. 그들에게 있어 눈앞의 생명체는 재미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연민이나 죄책감이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너무나 순수했을 뿐이다. 더 이상 갖고 놀 수 없게 된 고양이를 보며 흘린 벤자민의 눈물은,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의 울음과 같이 어딘가 아쉬움에 젖어 있었다.
▲ 영화 <이노센트> 스틸컷.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이 영화에서 벤자민은 악이라기보다 그저 순수함 자체를 상징했다. 그는 어머니의 폭력 아래에서 가족과 교감하지 못했고, 경제적 인종적 차이로 인해 이웃과의 교류 역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다를 비롯한 아이들과 만나기까지 그는 산속 비밀기지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왔으리라. 물론 그러한 폭력과 무관심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애초에 벤자민은 결코 비뚤어진 아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지. 그가 보는 세상에는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구태여 비뚤어져 복수할 상대 또한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이다는 벤자민과 마찬가지로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관심은 온통 자폐증이 있는 언니 안나에게 향해 있었고, 이제 막 이사 온 아파트에 친구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즉 이다 역시 아직 타인과의 연결이 끈끈하지 않은, 혼자만의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런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 그들은 함께 뛰놀고는 했지만, 또 한 명 새로운 아이가 등장하며 그들의 관계는 서서히 변화해갔다.
▲ 영화 <이노센트> 스틸컷.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새로이 나타난 아이샤는 다른 이의 마음을 읽고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에 누군가를 배려할 줄 알았고, 그래서인지 그는 네 명의 아이들 중 가장 어려 보였음에도 누구보다 어른스레 느껴졌다. 자폐라는 벽에 막혀 닿지 못했던 이다와 안나가 아이샤를 통해 서로에게 이어질 수 있었고, 그렇게 이다의 스케치북에 색이 더해지며 그와 벤자민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벤자민으로 돌아가자면, 그의 입장에서 아이샤는 내 도화지에 멋대로 붓을 대는 위협이자 이물이었다. 처음에는 그 역시도 이다처럼 마음을 열어가는 듯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껏 활용하지 않았던 초능력을 아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성장시키고 응용해갔으니, 이전과 비교해 분명한 변화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가 조금은 벅찼던 걸까. 순수함을 잃어가는 것이, 내가 바뀌어 버린다는 것이 그에게는 두렵고 불안했던 걸까. 결국 벤자민은 순수성의 상실을 거부한 채 혼자만의 세상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 영화 <이노센트> 스틸컷.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이다의 앞에서, 벤자민은 오래전 고양이를 죽였던 첫 만남과 같이, 단지 이번에는 사람을 향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단순히 그의 공격적인 성향과 사악한 마음씨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을 곱씹어 볼수록 어쩌면 이는 그가 두르고 있는 하나의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고 막으려 했던 아이샤처럼, 혹시나 이다도 나의 순수성을 해치려 하지는 않을지. 혹시나 함께 순수함을 즐기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지는 않을지 시험해 본 건 아니었을까.
애석하게도 지금의 이다는 더 이상 순수하지만은 않다. 그는 가족과 포옹하는 따스함을 경험했고, 친구를 기억하는 법을 배웠으며, 적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는 처세술을 익혔다. 그랬기에 그는 다시 벤자민과 함께하는 대신 언니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고, 마침내 순수함의 폭력까지도 끊어낼 수 있었다.
만일 다른 세 아이들이 주인공이었다면, 그들의 행적에 따라 영화가 선과 악의 이항 대립으로 비치는 데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벤자민으로 시작하여 아이샤를 거쳐 안나에 다다르는 이다의 성장을 통해 영화는 순수함의 이면에 대해, 그리고 포용의 중요성에 대해 관객에게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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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용준 시민기자의 개인 SNS와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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